2008년 05월 04일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후에 일본은 고구려를 속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이 낚시(?) 같지만.. 사실 이 블로그의 성격이 낚시에 주 목적이 있는거 아니겠습(퍽퍽)
================================
일본왕실에서 발해 성왕의 '천손' 언급을 비난하고 발해가 일본의 속국이라고 언급한 배경에 대해서는 제가 쓴 백제 게시판 2609번 글(링크) 후반부와 고구려 게시판 5142번 글(링크) 초반부를 먼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정치적 독립성과 자주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고 할지라도 외교 관계상에서 필요하다고 할 경우 아쉬운 쪽에서 저자세를 취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특히 명분론이 지배하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요.
6세기의 삼국이 한반도 패권을 놓고 쟁패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지지, 혹은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대일 외교에서 저자세를 취한 선례가 있지요. 이때의 일본에서는 그런 이유로 백제와 신라, 가야는 확실한 자신의 속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물론 지네들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본 왕실에서 일본 열도내에 도래해 있던 백제, 신라, 가야 계통의 도래인 호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정신적 구속장치로서 필요로 했기 때문이란 설명은 위에서 인용한 게시물에서 이미 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7세기 후반 이전까지, 일본열도는 백제와 신라는 속국으로 삼을 지언정, 고구려에 대해서는 속국으로 대하진 못했습니다. 바로 대등한 입장인 이웃나라란 뜻의 '인국(隣國)'으로 대했죠. 그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국제적으로 가지는 지위와 힘을 신생 대국인 일본으로써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5세기 초에 고구려에게 지독한 참패를 당한 전적이 있어 그것이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6세기 중엽부터 외교 관계가 개선이 되었어도 여전히 경외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는 산해관 이동 지역의 천명을 대표하는 국가로써, 그 지위와 권위는 백제와 신라로부터 아쉬운 소리를 듣는 걸 즐기는 일본왕실로써도 쉽게 넘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 멸망 전에는 일본 왕실이 고구려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 왕을 '고려신자(神子)' 라고 불를 정도였지요. 그 고구려의 영향으로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변해가던 일본 왕실이었지만 최소한 대등한 입장에서 고구려를 대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도리어 고구려에서 일본왕실을 낮게 봤으면 모를까..)
이런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부터입니다. 고구려의 자기 중심적 천하관을 많이 수용하면서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를 점차 다져나가던 일본왕실은 한편으로 경외의 대상이었던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로 인해 많은 유민집단들이 이주하면서 엉뚱한 생각을 품기 시작합니다. 바로 고구려가 가지고 있던 산해관 동쪽 지역의 천명(天命), 즉 맹주국 지위를 일본이 가져가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경외의 대상을 닮거나 최소한 넘어보고 싶은, 그도 아니면 트라우마의 극복 차원에서도 일본 왕실로써는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는 고구려 왕실의 후예라고 알려진 '약광' 이란 사람이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일본 열도에 망명해 왔지요. 그들 이외에도 많은 고구려 유이민 집단들이 이주해 왔고 이들의 대표격인 약광을 고려왕으로 삼아 제후로 여겼습니다. 즉,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열도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일본 천황은 명실상부하게도 고구려 사람들마저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 왕실의 후예가 일본왕실의 신하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고구려 왕의 천명이 일본왕실에게 복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신라에서 관리하던 보덕국의 지위도 그런 식입니다.)따라서 일본 왕실이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속국의 영역은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신라를 넘어서 고구려까지도 그 대상에 들어가게 됩니다.(일본 왕실이 산해관 동쪽의 맹주국 지위와 그 천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왕실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세계 제국이던 당과 대등한 '인국(隣國)의 자격을 얻기 위한 선결과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때문에 고구려의 뒤를 이어 건국한 발해가 건국 초에 스스로를 고려 국왕이라고 자칭한 것은, 실은 자주성의 표현이거나 고구려에 대한 단순한 후계 의식이라기보다 일본왕실로부터 외교적 지지, 지원을 요구하는 수단으로써 사용된 측면이 강합니다. 일본왕실에서 보살펴주어야 할 영역인 고구려의 후예국가가 위험에 직면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 발해를 발해라고 부르지 않고 자꾸 고려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발해 국초에는 세계제국 당과 대결하면서 흑수말갈과 신라의 압박까지 받아야하는 고충이 있어 일본왕실의 외교적 지지가 절실했다고 보입니다. 일본 왕실로써도 호족들에게 그런 자신의 국제적 지위를 과시하면서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어 발해와 일본 양자에게는 책봉이란 것이 서로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해가 당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고 신라와의 충돌도 소강되면서 흑수 말갈 지역에 대한 평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이 되면 발해에서 일부러 일본왕실에 대해 저자세일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필요 이상의 저자세를 고수하게 됨은 발해 왕실이 주변국과 나라 안의 유력자들로부터 그 권위를 지킬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발해에서는 저자세 외교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발해가 국초부터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임한 것은 발해가 그 국력이 충천할 때 산해관 이동 지역의 맹주국임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되기 때문에 일본왕실로써는 발해가 천손 운운한 것을 묵과해서는 안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왕실이 그동안 유지해오던 지배 권위를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발해와 일본 사이의 외교관계는 이런 복잡한 사정들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발해와 일본이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한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죠. 외교 관계가 냉랭할 때도 있었고 친밀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외교적 역학관계는 통일신라와 일본왕실 사이에도 나타납니다. 신라에서도 삼한을 통일하고 고구려의 후예인 보덕국을 제후로 삼은 것을 통해 역시 산해관 이동지역의 맹주국 지위에 관심이 있었으나, 초기에 당과 대결했던 전적이 있는 신라로써는 섣불리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고압적인 위치를 점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신라와 일본왕실 간에 외교 용어 몇개 가지고 유치하게 외교 트러블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 by | 2008/05/04 20:28 | 역사 | 트랙백 | 덧글(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일본이야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본격적인 율령국가, 천하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당당히 내딛으니까요. 저도 발해가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한 것을 보면 '꽤나 굴욕적일 수도 있는데 저자세를 유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구요?...
그건, (좀 농을 섞어서 말한다면...) 일본이 성립된 싯점에 이미 고구려는 없어져서 소멸되엇기 때문에 고구려 역사 일부를 일본이 뜯어 먹은 것이기 때문입니다...물론 당나라나 신라와 발해, 그리고 거란족이나 돌궐에서도 조금씩 잘라 먹엇던 것이기 때문에, 그당시에는 일본에서 자기들이 뜯어낸 고구려사고기를 어떻게 요리하던지 그들의 자유였다고 해야 하겟지요...
그러다가 김부식이 고구려사를 포함해서 삼국사를 쓰면서 원래의 고구려의 후계자가 우리 한민족으로 공인된 것이지요....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그랬었다는 것이지요...그래서 지금 동북공정으로부터 고구려사를 지켜낼려면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허점투성이의 삼국사기의 삼한론으로는 결코 고구려를 지켜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오직 '대륙공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에는 물, 불에는 불, 눈에는 눈....
일본서기에서 속국으로 기재된 고구려를 일본사 편입시키려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연유로 생뚱맞게 대륙공정 해야한다는 것도 황당합니다. 요지 좀 파악하고서 글을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