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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왜 마한일까? 2

고구려가 왜 마한일까?

위 포스팅에 대해


Commented by 번동아제 at 2008/05/05 21:50
사실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마한으로 간것을 매개로 구 고조선 중심지역에 잔류한 세력과 새롭게 천도한 세력도 마한과 연결고리를 가지게 됐다고 해석하는 조법종 선생의 주장은 근대 사학이 나오기 이전 이미 다산 정약용 선생도 제시했던 주장이죠.

과연 고구려시대에도 이같은 정통론적 관념에 입각한 유학적 역사계승의식을 가졌는지는 의문입니다만...고구려=마한설보다는 오히려 후한서나 삼국사기에 고구려군과 행동을 같이하는 마한의 존재가 조금 더 천착할만한 주제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백제의 마한정복과정에서 마한 북부지방에서 이탈해서 고구려로 들어간 집단이 고구려와 같이 등장하는 마한의 실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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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번동아제님께서 위 포스팅에 대한 댓글을 남겨주셨었습니다. 그래서 아방강역고를 살펴봤지요. 정약용은 삼국지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의 기사를 통해 그런 추론을 했었습니다. 위략에서는

'기준의 아들 및 친족들이 그 나라(조선)에 머물러 있었으며 성을 한씨라 했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약용이 살펴보건대, 기준이 남쪽으로 달아난 직후 위만이 평양을 호시탐탐 바라보고 있는데 기준의 종족들이 어찌 그 고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겠는가. 우거가 이미 멸망하고 나서 낙랑이 군을 설치한 초기에 만간에 도망해 숨어있던 기씨들이 비로소 감히 머리를 내밀어 스스로 한 부(部)를 만들고, 기준이 일찍이 한왕(韓王)이었기 때문에 멋대로 한씨(韓)라는 성을 쓰고 마침내 기씨의 제사를 모셨던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태조왕 69년조에서 태조왕이 마한, 예맥의 기병 1만으로 현도를 공격한 것에 대해

약용이 살펴보건대, 마한이 멸망한 지가 지금 114년이 되었다.(삼국사기 기준) 멸망했다가 다시 일어날 때가 아니요, 또 마한의 도읍이 본디 웅진의 남쪽에 있었으니, 어찌 백제의 경계를 넘어서 현도의 요동싸움에 좇아 전쟁할 수 있었겠는가. 기씨의 서쪽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마한이라 일컬었다는 것은 <<위략>>에서 일컬은 것이니, 나라 안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한씨라고 사칭한 것이다.


번동아제님께서 언급하신 부분은 바로 이 두 부분을 두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물론 조법종 교수님은 다산과 다른 방법으로 같은 결론을 내었던 것이었죠. 그런데 읽다보니 한가지 의문이 들더군요. 다산의 저 언급을 번동아제님의 지적을 통해 듣고보니 고구려의 마한 계승의식이라고 한 조법종 교수의 견해나, 다산의 언급이 뭔가 어색했던 것입니다.

즉, 위만에 의해 쫒겨간 준왕이 마한 땅에서 재건국했다고 해서 평양 쪽의 조선 유민들, 더 정확히 말해 준왕의 후예들이 스스로를 마한이라고 부를 정도로 마한에 대한 명칭에 대해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죠. 문화적으로 삼한은 조선에 비해서 떨어지는 편이었고 위만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선진문물도 받아들인 조선인의 입장에서 '마한' 이란 이름을 계승한다? 조금 어색합니다. 그 얘기인 즉,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이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100년 뒤의 일본인들이 페루를 일본의 새 국호로 사용해봄직하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요.

거꾸로 마한으로 이주했던 준왕이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면 모를까.. 조선인의 입장에서 마한이라는 네임벨류가 그다지 힘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앞의 글에서 제가 고구려의 필요에 의해 기존의 고구려 천명 구조(조선 천명이 포함된)와 삼한 천명의 융합을 위해 마한 계승을 강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준왕이 마한을 정복해 조선의 천명이 옮겨진 것을 빌미로 했다는 것두요. 그런데 둘 간의 연결고리가 별로 강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마한과 조선의 연결고리라고 해봐야 준왕이 마한땅에서 왕 한번 해먹은게 다니까요. 또한 조선의 정통이 준왕에 의해서 마한으로 옮겨졌다고 하지만 그 얘기가 성립하려면 남천한 후 준왕의 후예(평양에 잔류한 후예말고)들이 계속 살아남아 마한지역에서 계속 왕을 차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선의 천명과 삼한의 천명이 마한의 준왕을 통해서 연결되겠지요. 네임벨류를 무시한다고 치면 그런 점에서 평양에 잔류한 준왕의 후예들이 '한'씨 성을 운운할 수 있은 것일거고.. 그러나 실제로는 준왕 이후 기준의 후예는 삼한 지역에서 맥이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조선와 마한의 연결성은 거기서 없어진다고 할 수 있고 삼한 천명을 고구려에 연결시키는 것도 불가능해 집니다.

물론 고구려가 한강의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당위성을 얻기 위해 어거지로 그런 설정을 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얼마만큼 실효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위략에서는 기자의 후손들이 스스로를 '한씨' 라고 자칭했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제가 추론한 것과 달리 실제는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좀 달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준왕의 후예들이 스스로 '한'을 자칭했다는 점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ps 1. 글이 조금 길어지는 관계로 인해 나머지는 내일 중에 올려볼까 생각 중입니다...(도주중)

ps 2. 글을 처음 올려놓고 찬찬히 읽다보니 앞뒤 연결이 안되는게 많아서 4~5번을 수정을 했네요. ...이 짓을 왜 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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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단인 | 2008/05/22 14:56 | 역사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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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한단인의 빈수레 at 2008/05/23 21:10

제목 : 고구려가 왜 마한일까? 3
고구려가 왜 마한일까? 2조선에 비하면 네임벨류도 떨어지는 남쪽의 변방 족속 '한'이란 명칭을 계승했던 준왕의 평양 잔류 후예들.. 언뜻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꾸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준왕이 한의 땅에 가서 한왕을 칭한 것이 아니라 한왕을 칭해서 한이라고 불린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조금 생뚱맞은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삼국지 동이전이나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진국의 왕을 '진왕'이라고 칭......more

Commented by 一道安士 at 2008/06/10 17:53
후한서와 삼국지의 진왕기록 이해는 일본서기는 물론이고 삼국사기 이해의 필수입니다. 예를 들면 진왕기록에 대한 이해 없이는 다음 질문에 답변하지 못합니다.

[질문 1] 판독에 약간의 다른 견해가 있지만 칠지도를 준 사람은 百濟王世子奇生聖音으로 백제 왕세자입니다. 왕이 아니라 왕세자가 칠지도를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질문 2] 4세기 후반에 백제 왕세자 여휘가 동진으로부터 도독이자 진동장군 백제왕의 직위를 받습니다. 여휘가 왕이 아니라 왕세자를 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질문 3] 5세기 중반에 왜국의 왕세자 흥이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7국 도독의 직위를 요구합니다. 흥이 왕이 아니라 왕세자를 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8/06/11 07:39
일도안사님 책에서는 4~5세기 때에도 진왕이란 존재를 상정시키시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렇다면 삼국지 위서 한조에서 각 읍장이나 읍군에게 인수를 내려주고 하호조차도 군현을 방문할 때 의책을 갖춰입고 간다, 인수, 의책을 사여받는 사람들이 1천여명에 달한다는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실지 궁금하다는 질문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일도안사님의 책에서 외교권의 행사의 총 주체로서 진왕이 설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적어도 3세기의 한 사회에서는 각 씨족의 족장들마저도 독립적인 외교권을 가지고 동방변군과 교역을 하고 있다면 이들을 총괄하는 존재로써 진왕이란 존재 자체가 의미없는 셈 아닙니까?
Commented by 一道安士 at 2008/06/11 10:32
한단인님은 핵심을 정확히 집으셨습니다. 진왕이란 명목상의 국가원수이고 실권은 마한왕이나 진한왕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담로제 때문입니다. 담로제를 기반으로 진왕제의 전통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담로제가 진왕제보다 훨씬 먼저입니다.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가 비류국을 점령하고 비류국왕의 딸을 데려옴으로써 비류국과 혼인을 맺고, 결과적으로 고구려왕실의 친인척이 지방소국을 통치하는 모양새를 갖추는데 이것이 다물제(담로제)입니다. 만일 20여명의 지방호족과 혼인관계를 맺은 고려 왕건의 사신이 중국에 갔으면 그도 유사한 답변을 하였을 것입니다. 즉 고려왕의 자제종친이 전국에 봉분되어 각 지역을 통치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전체가 담로제로 덮혀있는데 한 예가 다음입니다. 제 책 "삼한사의 재조명"에 나옵니다.

*흘해이사금 2년; 봄 정월, 급리를 아찬으로 임명하여 국가의 주요한 정사를 맡겼다.
*흘해이사금 3년; 봄 3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혼인을 청함으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흘해는 명목상의 왕으로 소진왕입니다. 신라의 실질적 통치자인 급리가 왜국왕실과 혼인을 맺고 신라를 통치합니다. 즉, 신라가 왜국의 담로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담로제란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국의 통치제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유례이사금대에 진왕의 백제에게 망하고 기림이사금 이후 많은 변화를 거치는데, 4세기 전반의 신라본기와 중국사서 삼한전이 벽골제 기록을 비롯하여 완전일치합니다. 진한에 들어간 신라에는 많은 변화가 생기는데 대표적인 것 3개만 들라면, 하나는 국명을 변경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국가를 분할하는 것이고, 세번째는 군대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4세기 전반의 신라지역 고고학과도 일치합니다. 4세기 전반에 신라는 무기를 제조하지 않았습니다. 군대가 없으니 당연합니다.

신라가 진한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담로국에서 빠져나오는 다음 기록입니다.

* 흘해이사금 35년; 봄 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했으나 딸이 이미 출가하였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흘해이사금 36년; 봄 정월, 강세를 임명하여 이벌찬을 삼았다.

이 말은 흘해 35년 직전에 신라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바뀌어서 새 통치자의 딸을 요구하지만 새 통치자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새 통치자의 이름은 강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라가 왜국과의 담로관계를 단절하고 진한에서 빠져나오는 흘해 35년을 기준으로 전기신라와 중기신라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왜 흘해 35년에 신라가 격변하는가는 아실 것입니다.그 이유는 그 전해에 신라에 북방에서 내려온 대규모의 유목민족 기마군단이 진주하여 신라를 접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적석목곽분과 금관의 출현입니다.

이런 담로제가 오랫동안 진행되면 고려초 이자겸과 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전국의 소국 중에서 최고 실력자가 왕실에 자신의 여인을 공급하고 왕의 권위를 빌려 실질적인 통치를 하게 됩니다. 왕은 명목상의 직위로서 실질적으로 최고실권자가 임명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이나 일본의 막부와 비슷합니다.

좀 더 부연설명하여 예를 들면, 마한왕에게 딸이 있는데 진왕에게 4명의 왕자가 있습니다. 이 중에 누가 다음 진왕이 되느냐는 마한왕의 딸이 누구에게 시집을 가느냐에 따릅니다. 마한왕이 정신적 지도자인 진왕을 고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한왕이 보니 진왕의 왕자 중에 하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때는 진왕가 인물 중에 가장 친마한적인 인물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면 그 인물이 진왕이 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도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자신의 휘하 장군 1명에게 왕실의 여인을 주어 진왕의 양자로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장군이 새 진왕이 되는 것이지요. 명목상의 지위로 따지면 그 진왕은 마한왕보다 위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마한왕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지요.

진왕 아래에 마한왕, 진한왕, 변한왕 등이 있고, 그 아래에 또 신지(엄지)라 불리는 여러 소국의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실권은 마한왕, 진한왕, 변한왕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왕제가 폐지되는 것은 진왕가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패하여 왜국으로 망명하고 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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