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05일
청동기와 철기 수용에 대한 중국과 조선의 자세
카페 회원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제가 답변한 글입니다.
진 권량에 대해서는 아는게 하나도 없었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리던게 화근이 된 듯 싶습니다. ;;; 길림성에서까지 권량이 나온다니...
문제제기 원문은 이곳입니다.
그런데 맞는 말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같은 말도 왜 이렇게 어렵게 뱅뱅 돌려 쓰나 모르겠습니다. 다 쓰고 몇시간 뒤 제 글을 다시 읽어봤는데 제가 뭔 소리를 한건지 순간 이해를 못했다능;;; 좀 더 쉬운 표현이나 이해하기 쉽게 쓸 수도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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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권량에 대해서는 저도 아래의 글에서 적었던 만큼의 정보 밖에 없었는데 위의 사실을 알려주셔서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길림성에서도 저 권량이 발견되었다는 것에 내심 쇼킹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아는 바로 권량은 직접 지배의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주변국에 위엄을 모이기 위해 통일 도량형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다음의 이유로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받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해봐야한다는 것이죠. 조공책봉 관계(진 대에는 조공, 책봉이란 관계 설정이라 규정하기 어렵긴 하지만..광의의 의미에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지배와 복속의 관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입니다. 책봉을 내리는 측은 관념상에서나마 자신이 상위 지배자인 점을 내세울 수가 있고 그것을 통해서 자국 내 피지배민들에게 위엄을 세움으로써 권력 유지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책봉을 받는 측은 상위 세력에게 자신의 지배력이 인정받았음을 통해서 자기 세력권 내에서의 권위를 보장받는다는 측면이 있지요. 아주 간단하게 예를 들면, 전국구 단위의 깡패 두목이 지역구 단위의 깡패 두목과의 관계로 치환해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위 지배자의 경우 하위 지배자에게 직접지배의 의도를 내비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위 지배자는 자신의 지배 당위를 위해서 상위 지배자에게 고개를 숙였을 뿐이지 지배를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정지배의 의도까지 가지고 있는 권량이 황제의 위엄을 보일 위세품 사여에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기에는 부적절한 모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시황제가 통일 제국을 건국하면서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마인드로 그런 권량을 보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쉽게 생각할 부분이 아닙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건설한 이유는 '비인(非人)'인 '胡'와 중화를 격리시키기 위한 것으로 비인이었던 장성 이북지역은 진시황이 다스리거나 간섭할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권량이 장성 이외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저로써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약탈당해서 장성밖으로 유출되었다..그게 약탈당할 정도의 가치있는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귀금속으로 장식된 것도 아니고..)
물론 실물로서 권량이 길림성에서까지 출토가 되었다는 점이 부정될 순 없는 것이겠죠. 단지 청골님이 추정하셨던 이유로는 권량의 발견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긴 합니다만, 저로써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일단 제가 고고학도도 아니고, 중국 고대사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니 이게 제 한계라고 할 밖에요.
그렇게 된다면 진 권량만을 가지고 연진장성 유적이라고 판별하기는 어렵다고 하신 청골님의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확인을 좀 더 명확하게 하지 않고 제가 글을 성급하게 쓴 점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 같군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청골님의 지적이 연진장성 동단 위치가 요서에 있다고 할 게제는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청골님 스스로가 말씀하셨다시피, 진 권량이 연진장성 유적이라고 판별할만한 '필요' 조건은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일수도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겠죠.
또한, 위에서 언급한 권량 발견 지역에서 추론을 해보면 진 권량이 길림성에서도 출현한다고 되어 있는데, 연진장성의 동단이 요서에 있게 된다면 진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은 길림지역의 세력집단이 왜 권량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근거로 세형동검 발견 지역을 추가적인 근거로 놓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출현 시기는 진개의 침공과 일치하는데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면서 출토 지역 또한 청천강 이남으로 확 내려가는 것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세형동검이 출현할 당시 청천강 이북에서는 세죽리 연화보 문화가 등장하게 됩니다. 전국 계통의 철기 문화가 등장하고 있지요. 이것은 진개의 정복으로 청천강 이북부터 철기문화가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역으로 고조선이 연에게 그렇게 쉽게 밀린 까닭이 설명이 되지요. 무슨 말이냐면 연이 철기로 무장하고 있던 것에 반해 고조선 군은 청동기(비파형동검)로 무장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당시의 철기는 제련 기술이 그렇게 발달된 것이 아니라서 청동기 무기에 비해 성능에 있어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무기 생산량입니다. 청동기 제조에는 아시다시피 주석이 필요한데, 워낙에 구하기 어려운 금속이라서 생산하는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점으로 인해 전쟁에서 패한 후에는 청동 무기의 수량 복구가 대단히 어려워서 보통은 중앙의 지배집단에게서 패하여 '복속된' 하위 집단이 독립하거나 개기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주석광산의 관리라던가 교역을 통제함으로써 지방이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을 방해하죠. 상주 시대에 봉건제였음에도 중앙 조정이 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정이 존재하며 이것은 초기 고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면 철기는 광산이 상대적으로 널리 분포해 있어 중앙에서의 통제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만큼 지방에서 만들기에는 값싸고 쉽습니다.
이 점은 아마도 고조선의 지배 계층이 완전히 의식하진 못했겠지만 어느 정도는 철기 기술에 대한 수용에 있어서 '무한 경쟁' 상황의 중국과 달리 거부감을 들게 만들었던 한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지배계층에게는 자신의 지배권력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같은 성능의 무기를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개나 소나 싼값에 구할 수 있다는 점은 무력을 특권으로 생각해온 지배계층의 위신 문제와도 걸려 있어 그것을 쉽게 바꾸기란 어렵게 만듭니다. 원래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 사람들은 합리적 선택보다는 그간 편하게 써왔던 것을 사용하는게 상례니까요. 무기 권력에 의해서 중앙과 지방의 권력 관계, 신분간 권력 역학이 결정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런 역학관계는 외부 문화 수용에도 영향을 주거나 받기도 하지요.)
이것은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 수의 압도적인 차이를 낳습니다. 청동기가 가지는 무기의 권력 속성은 특정 지배층, 즉 전사 귀족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고 그럴 경우 나올 수 있는 군대의 수는 많아야 수만 단위이게 됩니다. 그러나 전국시대 연의 경우는 제민 지배와 철기 보급을 통한 '국민개병'적 징병을 통해 적어도 10만 단위의 군대를 상시적으로 동원이 가능하게 되지요. 따라서 연이 조선 땅 1천리를 정복하고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조선 공격 전에 연 소왕이 조나라 등과 연합해서 제나라 민왕을 공격해 얻은 막대한 재물이라든지, 철기 사용을 통한 농경에서 얻어지는 생산력을 생각해보면 국력 면에서도 연이 조선을 치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죠.)
세죽리 연화보 문화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전국계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조선 문화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저는 고고학도가 아니라서 말할 깜냥이 못되긴 합니다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있는데 전국 7웅과의 토지 개간 경쟁(?)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한 연나라가 굳이 조선 땅에서 물러나야할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 한나라의 변군 지배(원주민의 자치 세력을 인정한 간접지배의 형식)를 당했던 평양 일대에서는 세형동검 출현이 그래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과 달리 세죽리 연화보 문화에서는 세형동검은 커녕 청동 무구 출현이 거의 씨가 말랐다는 점에서 연의 제민 지배를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철기는 청동기보다는 대중적이어서 귀족집단의 헤게모니 장악이 어렵고 제민지배를 쉽게 한다는 속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만약 세죽리 연화보 철기 문화가 고조선의 것이라면 우거왕 당시에 우거왕을 배신한 조선상 역계경이나 예군 남여의 이탈을 막지 못할 정도로 고조선의 중앙권력이 공고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이런 양상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막 넘어가면서 중앙과 지방의 권력 다툼이 막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동기 사용 시절에는 중앙에서 청동기에 대한 통제가 쉬워서 제도로써 지방의 힘을 억누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중앙에 힘이 집중되지만 철기로 막 넘어가는 시점이 되면 구조적으로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가 가해지지 않은 경우 상대적으로 확보하기 쉬운 철기로 무장한 지방세력들은 언제든지 중앙에서 이탈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얘기는 진개의 조선 침공 후에 세죽리 연화보 문화라는 철기 문화가 고조선에 수입되었다면 그 연속성에 의하여 한무제의 조선 침공까지 수백년의 시간 동안 고조선의 중앙조정은 왜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을 확보하지 못했느냐란 의문점에 봉착하게 됩니다.
ps. 진 대에 변군지배는 등장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청골님께서 신농님께 한 답변 댓글 중에서 [조선도 진나라에 칭신을 하였다고 사기에 나옵니다. 그렇다고 진나라가 조선 땅에 장성을 쌓지는 않았죠.] 라고 하신 댓글에서 '칭신'하면 간접지배가 전제된다고 하신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 대한 반론으로 한대 변군지배를 예로 든 것입니다. 진대에 있었던 칭신이라는 것은 정치적 복속(간접이든 직접이든)까지 전제되었다고 보긴 어려운 면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한대에 들어오면 변군을 통해서 이민족에 대한 직접지배와 간접지배(여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이민족에 대한 관념 변화로 발생합니다
# by | 2008/06/05 23:36 | 역사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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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또 삽질한 건가..- 철기 수용에 대한 중국과 조선..
청동기와 철기 수용에 대한 중국과 조선의 자세 이 포스팅 올린 지 한 2주 좀 안된거 같은데.. 부산대 역사교육과 공개자료실에서 뭘 좀 찾을게 있어서 들어갔다가 정작 찾을 건 찾지 못하고 [이남규 (1999) 한반도 고대국가 형성기 철제무기의 형성과 보급 ­중국과의 비교적 시각에서] 란 논문을 보고 땡겨서 다운받아 읽고 있었지요. 그런데..한편 表3를 보면 戰國時代 晩期까지의 劍, 鉾, 戟과 같은 근접전투용 철제 무기들......more
압록강 유역~한반도 서북부에서의 이같은 막대한 출토량은 면적대비 출토량으로 따지자면 연나라의 중심지역인 하북성의 59000건을 오히려 상회하지요. 명도전의 국적에 대해 따질 생각까지는 없지만 명도전의 출토를 정치적 의미로 해석할 때 조금 더 신중하게 따져볼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른바 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식별되는 문화가 요동에 출현한 이후에도 단동의 초가보, 집안의 오도령구문, 통화의 만발발자에서 무기를 포함한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하는 유적이 확인되는 것을 봐도 당시 요동-청천강 사이의 정치적 환경이 지역에 따라 상당히 복합적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은 청천강 이북에서 여전히 연의 직접적 지배를 받지 않는 토착문화 내지 토착 정치체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줄뿐 고조선으로 지칭되는 정치체가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주장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의 침략이후 진한을 거치면서 고조선의 영역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여전히 성급하게 논할 주제는 아니니까요.
명도전..은 진개의 정복 이후에 요동반도 남단에서 이뤄지고 있던 제나라와의 교역루트가 사실상 단절됨으로써 주 교역 대상이 연나라로 바뀐 뒤에 그 수량이 많아진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물론 그러자면 그 이전시기인 제나라 도전이 고조선에서 어느 정도 출토되는 가를 알아야하지만 관련 정보를 제가 알지 못하는 관계로 그냥 생각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죽리 연화보 문화에서 세형동검 출토량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 것과 초가보, 오도령구문, 만발발자의 유적 등은 제가 미쳐 알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유적들은 연진장성 유적에서도 상당히 변경에 위치한 지역이군요. 연진장성 내부에 좀 더 깊숙한 곳에서는 말씀하신 청동기 관련 유적은 없는지요? 이를테면 동시대에 천산산맥 서쪽으로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 유적 말입니다. 연진의 제민지배 범위를 알 수 있는 지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권량 문제도.. 제가 현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말한 듯하여 성급하게 말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성에서 근거리 지역이라면 교역상 필요로 보냈거나 요청했을 수도 있는데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ps. 저 글을 쓰기 직전에 연진장성 동단의 위치는 천산산맥 어디 즈음이고 고조선은 청천강 이남으로 내려갔지만 연진과의 변경 사이에 독립적으로 존재한 각 소집단이 병립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왜.. 좌갈석, 우갈석이란 기록이 있고, 좌갈석은 고구려 땅에 있다고 한 기사를 보고서 생각을 해봤는데 청천강 이북은 박천 평야 때문에 갈석산이라고 이름할 만한 산을 찾기가 어려웠고 내륙의 산에서 박천평야까지의 거리도 상당히 멀어서 연진장성 동단으로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산산맥 어디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지요.(물론 요녕성 지도를 더 자세히 봐야 하겠지만 수중에 그게 없어서..)
후에 위만 정권이 성립되면서 요동반도 남단의 연안항로 장악을 통한 삼한 사회 교역권 통제가 가능하려면 그래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요. 물론 위만조선이 평양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것 자체가 삼한 입장에서는 연안항로 장악이 되는 것이긴 하겠습니다만.. 제가 좀 황당한 생각을 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