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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고구려 요동' ~썰 중에 하나까기? - 요서 백랑성=고구려 마미성?

문무왕릉비 투후 기사의 실체는...

발해 수령 포스팅에 쓸 사료를 찾을 게 있어 모처럼 역사문 카페에 들어가서 검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마침 제가 찾던 부분을 찾아서 읽긴 했는데 포스팅에 쓸 근거 사료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더군요. 이래서 야매로 공부하면 몸이 고생..;;;

그런데 사료를 인용하고 있던 글은 고자(응?) 묘지명 일부를 근거로 '요서=고구려 요동' 설을 지지하는 설이라 괴악함을 느껴 말싸움을 했던 글이었습니다. 문득 그때 옛 생각이 나서 그 글을 읽고 있었죠. http://cafe.daum.net/alhc/51q2/4458

엄밀히 말하면 디시에 떠돌아다니던 썰의 하나였는데 아직 미혹함에서 벗어나기 전의 저인데도 불구하고 꽤나 괴악스럽게 여겼던 글입니다. 별 생각을 않고 몇가지 미심쩍은 걸 걸고 넘어졌는데 글 쓴 본인이 찾아와서 반론을 쓸 줄은 몰랐지요. 그런데 이 글을 언급하는 까닭은 그 읽다보니 야스페르츠님이 언급하셨던 '고사의 수사적 인용을 실제 사실과 관련 있는 것으로 연결짓는 중증 난독증' 과 유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 글 본문에서는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 5월 23일 마미성(磨米城) 남쪽에서 죽으니 춘추 33세였다.” (寇賊憑陵晝夜攻逼?孤?闊糧盡矢?視死猶生志氣?勵父子俱陷不屈賊庭以萬歲通天二年五月?三日終於磨米城南春秋?有三 )

아마도 고문(高文), 고자(高慈) 부자는 홀로 적진 깊숙이 남아 최후까지 구원병을 기다리며 전투를 벌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국 구원병은 오지 않고, 양식과 화살이 다 떨어져, 결국 마미성 남쪽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것이다. 이 비문에서 결정적 증거는 그 다음 명문에 있다.

“짚으로 만든 개가 한번 이르자 아름다움과 추함이 함께 의지하고, 백랑성(白狼城)의 구원이 끊어지자 황룡수(黃龍戍)에 사람이 드물구나.”(有違芻狗一致美惡同依白狼援絶黃龍戍稀)

-중략-

마미성의 구원병은 백랑성에 있었다. 백랑성에서 구원이 끊겼지만 고문(高文), 고자(高慈) 부자는 최후까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벌였다. 바로 황룡수(黃龍戍)에서 말이다. 그리고 결국 마미성 남쪽에서 최후를 맞았다.

황룡수(黃龍戍)는 바로 황룡성이 있었던 곳이고, 강단사학계에서는 지금의 조양 남쪽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최후까지 전투를 벌였으니 황룡수는 결국 마미성이다. 따라서 지금의 조양(朝陽) 인근이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인 당나라의 마미주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라고 하면서 고구려 마미성=요서 백랑성 이라더군요. 그때는 아는 바 일천하고 불민하기 짝이 없는 저인지라 되도 않은 소리까지 늘어놓으며 반론이랍시고 글을 써갈겼는데 지금 보니 낯이 다 화끈거립니다. 헛소리를 제법 많이 써두었더군요. 반론이랍시고 제가 지껄였던 말은 [성이 어쩌네, 수가 어쩌네,, 혹은 고자 부자(응?)가 황룡수에서 마미성까지 도망친거네..]란 황당한 소리였더군요. (이래서 '모르면 가만히 있지. 중간이나 가게' 란 말이 있나 봅니다. OTL)

얼마 전에 야스페르츠님 글을 읽고 이 글을 다시보니 명문 마지막 부분에서 백랑수와 황룡수를 언급한 것은 마미성에서 외롭게 전사한 고자 부자를 보다 서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에 불과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백랑성과 황룡수가 언급된 명문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봉래산이 높고 요하(遼河)가 길게 펼쳐져 5족(五族)의 부락을 이룬 산천(山川)의 한 귀퉁이에 영기(靈氣)가 머물렀도다. 사람은 정결하고 어질고 싸움에서는 결실을 드러냈으니 후손들이 그 향기를 기리도다. 첫 번째.
뛰어나구나 조상이여, 아름답구나 후손이여, 창을 비켜잡고 국난을 평정하고 검을 뽑아들고 먼지를 깨끗하게 했도다. 의(義)를 보면 용기를 내고 겸양에는 인(仁)이 있으니 그 선명한 맹서 큰 띠에 적어 영원하도다. 두 번째.
어리석고 간사한 무리가 일어날 때 왕자(王子)로 출사(出師)하여 우리에게 복속시하고 버드나무돛에 망망창해에서 창을 휘둘고 악인을 처치했도다. 자(子)로는 효도하고 신(臣)으로는 충성하여 집안으로부터 나라를 드러내었도다. 세 번째.
선함을 쌓았으나 녹은 없고, 덕으로 도왔으나 어그러짐만 생기는구나. 짚으로 만든 개가 한번 이르자 아름다움과 추함이 함께 의지하고, 백랑성(白狼城)의 구원이 끊어지자 황룡수(黃龍戍)에 사람이 드물구나. 이릉(李陵)은 머물렀으나 온서(溫序)는 돌아갈 것을 생각했구나. 바라건대 일월에 기원하고 황천에 완염(琬琰)을 보내노라. 네번째.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뒤에서 이릉과 온서를 운운한 걸 봤을 때 암만 생각해봐도 이건 고사 인용한 게 맞는거 같아서요. 그런데 그러자면 백랑성과 황룡수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고사가 있어야 할텐데 아는게 일천한 저는 그런 고사를 들어보질 못해서리... 혹시 이거 유명한 고사인가요? 제목을 괴설 까기? 라며 물음표를 친 까닭은 그 때문이라능..(먼산) 



소하님이나 자명님 같이 고전에 밝으신 분이라면 아실 것 같지만 이런 허접한 포스팅을 보실지는 의문..


결론 : 야매로 공부하면 몸이 고생..(먼산)


덧.  바..발해 수령 포스팅은 내일 연재가 가능할까염? (도주)


 

대주(大周), 고(故) (장무)장군행좌표도위낭장(壯武將軍行左豹韜衛郎將) 증좌옥검위장군(贈左玉鈐衛將軍) 고공(高公)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무릇 군을 지휘하여 적진과 성을 함락, 항복시키는 자를 양장(良將)이라 하고,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분골쇄신 다하는 자를 충신(忠臣)이라 한다. 줄을 치고 나무를 깎아서 기록을 시작한 이후의(結繩과 刻字 이후)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실로 두 가지를 고루 갖추거나 겸한 자가 드물다. 동관지서(東觀之書)와 남사지필(南史之筆)을 두루 살펴보면 문재(文才)가 끊이지 않고 무사(武士)도 어깨가 닿을 정도로 많으나 부(父)에 효도하고 군주를 섬기는 데에 자신의 몸을 가벼이하고 의(義)를 중시하며 충성과 정절의 표징과 길흉의 분별에 뜻을 세우고 번개와 천동이 진동해도 변하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굽히지 않은 사람은 장군(將軍)일 따름이다.

공은 이름은 자(慈)이고 자(字)는 지첩(智捷)으로 조선인이다. 선조가 주몽왕을 따라 해동의 여러 오랑캐를 평정하여 고구려국을 건설한 이후 대대로 공후재상(公侯宰相)이 되었다. 후한말에 이르러 고구려는 연의 모용씨와 싸워 크게 패하여 나라가 장차 멸망하려 하였다. 이 때 20대조 밀(密)은 분연히 창을 잡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목을 벤 자가 무척 많았다. (이로) 인하여 연군(燕軍)을 파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봉(封)을 내려 왕(王)으로 하려 했으나 세 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고성(高姓)과 식읍 3천호를 내리고 또한 금문(金文), 철권(鐵券)을 내려

by 한단인 | 2009/01/02 17:16 | 역사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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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야스페르츠 at 2009/01/02 20:46
헐...... 자치통감을 찾아봐도 안나오네요... 고사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 메이저급 사서에 등장해야 고사라가 할 수 있는 거겠죠. 해당 비문에 대한 연구 논문을 찾아보심이 어떠한지요?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1/02 22:43
한국사서지에서 검색을 해보니 다음과 같은 결과물이..

[내등호차랑(內藤虎次郞). <근획의 이, 삼 사료 - 부여융묘지,부여융과 신라왕과의 맹문, 천남생,천남산묘지명, 고자묘지 -> (일문). <<예문>> 11, 경도: 경도제국대학 경도문학회, 1920]

...국회도서관에는 아예 안나오는군요.

음..또 저 삽질한 건 아니겠죠?
Commented at 2009/01/03 10:5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1/03 16:28
음..그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 그러면 그 양반은 백랑수가 중국쪽에서 붙인 지명일 뿐이고 고구려의 요하는 다르다..라는 식의 레파토리를 펼칠 것 같아 관두었던 기억이...(털썩)
Commented by 耿君 at 2009/05/06 11:25
좀 뒷북이긴 하지만..
이릉 http://100.naver.com/100.nhn?docid=125620
온서 http://kr.blog.yahoo.com/ez.magnetar/MYBLOG/dist_frame.html?d=http%3A%2F%2Fkr.blog.yahoo.com%2Fez.magnetar%2F301%3Fm%3Dc%26amp%3Bno%3D301&s=n

이릉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투항하여 '머물렀고', 온서는 농서에서 외효에게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으나, 혼령이 되어서도 '돌아갈 것을 생각'했지요.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5/06 17:28
음.. 온서가 저런 사람이었군요. 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포스팅이 뭔가 뻘 포스팅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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