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 로그인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대해 사소하게 까는 글..(일부 수정)

초록불님과 악질식민빠님, shaw님들 같은 분들에 의해 환단고기 위서론이 더욱 공고해진 이 마당에 새삼스럽게 또 변변찮은 수준의 까는 글을 남기는 것은 많이 민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선학들에 의해 이미 비슷한 내용이 이미 쓰여진 것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굳이 사족을 남기는 까닭은 해당 분들의 글을 취합해서 나름 정리, 요약하려는 어떤 분께 조금이라도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함이니 독자제현께서는 이 점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능...
환단고기에서도 태백일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4종 사서 전체 중에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양이 많습니다. 그런 고로 허점이 잡힐만한 곳도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겠죠. 본 포스팅에서는 태백일사 중에서도 환까 계통 분들이 그닥 많이 다루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워낙에 허점이 많은 부분이라 대진국본기의 짜잘한 얘기는 사소한 편이므로 넘어가기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투는 중간중간에 일부러 시건방진 표현을 썼으나 신경쓰면 지는 겁니다.(먼산)


아직 환단고기 긍정론에 머물러 있던 몇년 전의 소싯적에도 태백일사는 뭔가 좀 이상한 부분이 자꾸 눈에 띄곤 했습니다. 그때는 흐리멍텅하게 좀 이상하다란 느낌만 받다가 요 근래들어 그때 이상한 느낌을 주는 부분을 다시 보다보니 새롭게 보이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환까 계통 분들이 별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은 '대진국본기' 부분이 왠지 눈에 잘 들어왔습니다.

사학사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부분이 더욱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한국사학사에서 발해사가 처음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은 18세기 후반 유득공의 발해고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 발해사는 한국사 영역에서 전혀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유득공이 고찰한 것처럼 고려조에서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후속 연구들에 의해서도 발해사가 한국사로 다뤄지지 않은 것은 신구당서 이후의 사료들이 발해를 고구려 별종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속말말갈의 후예라고 한다는 점 때문이겠습니다. 신구당서에서 삼한(여기서는 마한,진한,변한을 각기 계승했다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달리 표현한 삼한)을 동이로 다룬 것과 달리 발해는 북적으로 분류한 것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같은 오랑캐지만 격이 달랐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무엇보다도 주자성리학과 사대 관계가 투영되던 18세기 이전 조선에서는 사대적 명분론에 의거하여 사대관계에 보다 충실했던 '(단군)-기자-마한-삼한'이 강조되었던 터라 부여 정통론에 해당하는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정통 인식은 당시까지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해는 조선 사족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암튼 18세기 후반 이전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발해사는 조선에서도 자국사로 인식하는 경향이 거의 없다시피했고 관심도 별로 없었습니다.(추가 : 물론 조선조가 그렇다는 것으로 고려조에서 발해가 아주 다뤄지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몽고침략 이후에 서술되어 민족적 성격이 강했던 제왕운기에서 소략하나마 고구려 후계라는 지점에서 언급을 하고 있고 이후 조선에서도 미약하나마 발해를 고구려 후계로 언급은 되고 있죠. 하지만 그것은 트랙백할 정정 글에서 쓴 것과 같이 정통 인식에서 변방에 위치하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중엽에 중국 대륙에서는 청조가 성립되어 사대 명분론이 역사인식에 미치는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실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편이긴 하지만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정통인식에 의해 발해사를 한국사의 '정통' 영역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18세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결실로서 1784년 유득공에 의해 발해고가 저술된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사학사상의 개략적인 내용입니다.(물론 삼한 정통론을 고수하던 유학자들도 많았습니다.)

여기에 좀 더 첨언을 한다면 청의 침략과 사대관계 강제로 인한 반발심으로 '국토의 연혁과 계승, 그리고 북방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고 1777년 청 건륭제의 명령에 의해 만주족의 정체성 찾기란 명목으로 만들어진 만주원류고에 자극받아 그에 반발하고자 발해사의 한국사 편입이 가능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태백일사가 쓰여졌다는 16세기 전반은 18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이런 시대적 상황에 부합을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겠죠. 앞에서 이미 한 얘기지만 16세기에는 단군조차 소외되었고 기자와 삼한정통론이 대세였던 시기입니다. 주자성리학과 사대 관계가 역사인식에 미친 영향이 최고조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그 때에 단군은 고사하고 삼한정통론과 가장 거리가 먼 발해가 등장한다?



글쎄요?


결국 이유립은 태백일사에서 발해사를 이맥이 썼다고 뻥을 치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뭐..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10만의 인구와 발해 태자가 고려로 귀부하였으니 발해의 왕실 기록들이 고려에 대거 들어왔을 것이고 이것이 16세기 이맥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라구요. 그럼 과연 그럴까요?

우선 발해 왕실 기록이 고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발해사는 고려조에 의해서 편찬되진 않았습니다. 관심이 없었던 거죠.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투영된 주된 역사인식은 '삼한 정통론'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앞서 추가한 내용처럼 제왕운기에서 아주 소략하나마 발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태백일사와 비교했을 때 양적인 면에서 대단히 소략한 만큼 제왕운기에서 이어진 발해사 관점이 태백일사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물론 조선만큼 사대 명분론에 충실했다고 할 순 없지만 고려에서 발해가 주목받을 만한 시대적, 역사적 인식을 갖췄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때문에 고려로 유입된 발해 왕실 기록 상당수는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 거란 침입으로 7대 실록도 날려먹고 몽고 침입으로 대장경도 날려먹어 새로 찍어내는 판인데 발해 왕실 기록이라고 무사할 리가 있을라구요?)


그래서 등장하는게 진역유기와 조대기의 비전 전수설입죠. 그나마 한 두권은 남아서 후대에 전수되었을 거라고 가정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들을 인용했다는 태백일사를 감안했을 때 발해사 기록 외에도 상고사 기록도 있다고 하지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양측에서 다 인용되고 있다고 알려진 두 사서로 진역유기와 조대기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상한 건 같은 책을 인용하고 있음에도 두 책의 내용 흐름이 다르다 이겁니다.(일단 규원사화에서는 발해사 기록은 없으니 상고사 기록을 기준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뭐.. 세세한 부분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제가 다 확인할 바가 못되니(가장 큰 문제는 제가 규원사화는 제대로 읽어본 일이 없다는 겁니다. OTL) 그냥 넘어가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소한 어느 한쪽은 두 사서를 참고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둘 다 두 사료를 참고하지도 않았는데 뻥을 쳤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일단 규원사화가 뻥을 쳤다고 가정을 하고 태백일사는 긴가민가하다고 칩시다.

일단 이맥이 진역유기와 조대기를 모 도인에게서 얻어 확보를 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맥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단군은 고사하고 기자 숭배를 극진히 해가던 시대에, 그리고 발해사를 오랑캐 듣보잡으로 생각하던 그 시대에 관리이자 유학자였던 이맥이 그 책들을 보고서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꺼라 생각하십니까?




라는 반응을 보인다는데 붕어빵 1개 걸어도 좋습니다.


뭐..좋아요. 정말 이맥이 별종이라서 두 책들을 보고도 듣보잡 운운하지 않는다고 가정을 합시다.(아니 뭐..진역유기, 조대기 말고 다른 사서를 통해서 발해사 정보를 얻었다고도 칩시다.) 그래서 두 책을 기반으로 깨달음을 얻어 대진국 본기를 통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시켰다고 치자구요. 시대적 인식을 몇세기를 걸쳐 뛰어넘는 천재적 선각자라고 치자니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태백일사 마지막에 등장하는 태백일사 발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태백일사를 언제 저술했는지에 대한 개략적 설명이 저자인 이맥에 의해 쓰여져 있습니다.


태백일사 발
세는 갑자년(1504년) 괴산에 유배되어 적소에서 마땅히 근신하니 매우 무료한 터라, 집에 간직한 여러 상자들을 취하여 조사해 본즉 사전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 또 평소에 여러 고로들에게 들은 것들을 합쳐서 채록하였는데 책으로는 채 만들지 못했던 바라, 뒤 16년(1520년) 경진에 내가 찬수관으로 뽑혔기 때문에 열심히 내각의 비밀 서적을 얻을 수 있어 이를 읽고 이를 앞의 원고에 곁들여 편차하고, 이름지어 태백일사라 하였다.

읽다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우선 이맥이 괴산에 '유배' 되었다고 했는데 집에 있던 '사전'들을 어떻게 취해서 조사를 해봤을까요? 그는 삭탈관직해서 낙향된 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유배'된 것인데 말입니다.

뭐.. 유배되긴 했지만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 유배지에서도 외부와 통교함이 불가능하지 않았다고 칩시다. 그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이맥이 괴산에 유배된 지 16년 뒤인 중종 15년에 찬수관으로 뽑혀 내각의 비밀 서적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근데 찬수관이라니? 아마도 실록의 찬수관이나 편수관을 일컫는 말일텐데 중종 연간이면 연산군 일기를 편수했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런데 조선왕조 실록에서 연산군 일기는 중종 2년에 편수를 시작해 4년에 편수완료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찬수관 명단에 이맥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11일(갑신) 5번째기사
《연산일기》의 수찬관을 임명하다
정부가 아뢰기를,
“사기(史記)는 만대에 전하는 것이니, 그 수찬(修撰)이 쉬운 일이 아니요, 또 수찬하는 사람은 지극히 공평하고 바른 사람으로 하여야 합니다. 지금 폐주(廢主)534) 의 《일기》 를 수찬하여야 하겠는데, 폐조에서 외람되게 은총을 받은 자라면 사실을 포폄 시비(褒貶是非)함에 있어, 반드시 중외의 사람들이 그 뒷일을 말하지나 않을까 의심할 것이고 중외의 사람들 역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직필(直筆)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시비와 선악의 의논이 반드시 바르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전조에 혐의가 없는 이를 택하여 천망해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라, 성희안(成希顔) 을 총재관(摠裁官)으로 삼고, 신용개(申用漑) · 김전(金詮) 을 도청 당상(都廳堂上), 김봉(金崶) · 성세순(成世純) · 성세명(成世明) · 조계상(曺繼商) 을 각방(各房)의 당상으로 삼았다. 색승지(色承旨)535) 는 참찬관(參贊官) 안당(安瑭) 이었다.

중종 9권, 4년(1509 기사 / 명 정덕(正德) 4년) 9월 12일(신축) 2번째기사
춘추관(春秋館)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의 찬집(撰集)을 끝냈다.

...이하 중략...


아무리 봐도 중종 4년과 중종 15년은 갭이 너무 크지요.  뭐.. 좋아요. 책임자가 아니라 실무 담당자라서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치겠습니다. (일단 정난공신으로 책정된 그가 책임관이 아니라 실무 담당자란 설정부터가 이미 막장이지만..) 그래도 4년에 완성된 실록을 15년에 찬수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하는 건 이상하죠. 혹은 괴산 유배 후 16년 뒤인 중종 15년이 찬수관으로 임명된 때가 아니라 태백일사를 완성했을 때라고 가정해도 4년 찬수관 내역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앞서 정난공신으로 책정된 그가 실무책임자라서 기록이 안되었을거란 추측은 말이 안됨을 얘기했습니다. 따라서 실록 편수관이 아니라 다른 모종의 찬수를 맡았다라고 치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조선왕조 실록을 뒤져봐도 연산군 일기 외에 등장하는 중종대 찬수관 기록은 명종 5년에 중종 실록을 완성했다라는 중종 실록 말미의 실록 편찬 정보 외에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뭐.. 그것도 좋다 이겁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모종의 '비밀 임무'를 맡았다라고 음모론을 짜보자구요. 그런데 심지어..


'태백일사'에서 이맥이 찬수관을 역임했다라고 한 중종 15년 그해의 8월 30일에 이맥은 탄핵을 당합니다.




중종 40권,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8월 4일(기미) 1번째기사
헌부(憲府)가 문서귀(文瑞龜) · 신수(申洙) · 윤내(尹鼐) 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 이맥(李陌) 은 처음 판결사(判決事)에 제수(除授)되었을 때에 대중(臺中)에서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요즈음 듣건대 겸 판결사(兼判決事) 최중홍(崔重洪) 과 의논이 맞지 않아서 일이 많이 밀린다고 하니, 빨리 가소서.”
하고, 간원(諫院)이 중삭연(仲朔宴)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 40권,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8월 30일(을유) 2번째기사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니 이맥은 갈라고 명하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다


찬수관으로 임명되었다던 15년 중종 기록 중 이맥과 관련된 기사는 8월 4~30일까지의 기사인데 이 기사들 전부 ''판결사' 이맥을 탄핵해달라는 상소가 다입니다. 이후 이맥이 조정에 재등장하는 때는 중종 20년인 1525년입니다.

중종 55권, 20년(1525 을유 / 명 가정(嘉靖) 4년) 11월 11일(병인) 7번째기사
이맥(李陌) 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로, 임권(任權) 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이귀령(李龜齡) 을 홍문관 부응교로, 홍석견(洪石堅) 을 사헌부 지평으로, 정언호(鄭彦浩) 를 교리로 삼았다.

일단 중종 15년과 20년에 등장하는 이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십당 이맥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는 능력이 부족하여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일십당 이맥이 맞다면 분명히 아귀가 안맞지요. 실록에 기록이 안되었지만 중종 15년 1월 1일에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찬수관에 임명되어 8월 30일까지 일을 했다고 해봐야 과연 얼마나 많은 책들을 보고 참조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적어도 찬수관이란 본연의 임무는 해야 할 시간에 다른 책을 짬짬히 찾아볼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공무원 녹은 허투로 주는게 아닐테니까요.

뭐..동명이인이라서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비밀 찬수임무를 맡았다고 치거나, 아니면 8개월 동안 책을 모을 수 있었다 라고 또 또 가정을 해봅시다.(하아.. 지친다..) 그런데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태백일사에서 소도경전본훈을 저술했을 정도로 도교적 이해가 깊을 거라 생각되는 이맥이 정작 소격서 혁파에 대한 유학자들과 삼사의 간언에 대해 실록에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검색능력이 떨어지는데다가 대강대강 살펴봐서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소격서 혁파와 관련한 이맥의 기록은 그의 탄핵기사와 소격서 혁파를 대간들이 함께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이 고작이더군요. 예...좋아요. 본인이 맞다고 치고 탄핵 중이니까 찍소리 못하고 있었다..라고 친다면 탄핵 상소가 올라오지 않았던 때에는 왜 가만히 있었나염? 그냥 사람이 소심해서 그런건가염?(아님 제가 대충 찾아서 못찾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글쎄요?)

아..이제 더 이상 음모론으로써 변호하는 것도 지칩니다. 가정에 가정을 거듭하며 이맥의 태백일사와 그것을 전수했다던 이유립을 변호하려고 해도 의혹만이 계속 남을 뿐입니다. 제가 쓸데없이 의심이 많은 막장이라 그런 건가염?


덧 1.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맥을 검색하면 기사 3분의 1이 이맥을 탄핵하는 상소로 점철되어 있더군요. 실록을 읽으면서 이 양반 도대체 한게 뭔가 싶었습니다. 실록을 뒤적거려보면 정난공신이긴 한데 딱히 이렇다할 공 세운것도 없이 사헌부 장령으로 있다가 연산군한테 뻗대서 쫓겨난 것과 가문의 연줄을 잘 타서 능력도 없는데도 고위직에 임용된 것처럼 보이더군요. 거기에 성격도 독불장군형이라 대사간과 판결사로 재직 중일 때 아래 사람들과 의논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라 그에 대한 탄핵상소가 되게 많았습니다. 암튼..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인 듯.. (뭐.. 제가 깨작깨작 실록을 찾아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평가할 깜냥이 못되는 무능력한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혹 제 부족한 검색력과 판단력을 대신하여 반론을 제기해주실 용자분이 계시다면 절 좀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덧 2. 이런 사소한 까는 글이 작성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접근하기가 옛날보다 쉬워졌고 또한 검색기능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찾아보기가 아주 수월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을 1970년대의 이유립을 갖추진 못했습니다. 만약 그가 현재와 같은 환경을 갖춘 상태에서 환단고기를 저술했다면 저 같은 듣보잡 눈에 띌 정도로 허술하게 쓰진 않았겠습니다만 당시의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고 접근이 가능했더라도 저렇게 이맥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이맥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면 고성 이씨 족보를 통해서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족보는 정확하지 않은 편이기도 하고 윤색이 굉장히 심한 사료에 속합니다. 적어도 실록에서 이맥의 사람됨에 대한 약간의 문건을 읽었다면 이유립은 태백일사 저자로 이맥을 채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태백일사의 저자로서 이맥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고성 이씨 중에서 조정의 비기를 접할 수 있는 고위 관료였다는 배경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처음 품었던 때인 학부 2~3학년 즈음에 고성이씨 세계를 조사하다가 행촌 이암과 일십당 이맥의 세계가 직계로 연결되지 않고 이암의 방계 가문에서도 장남이 아님을 보고 어떻게 이맥이 행촌의 단군세기같은 비전 문헌을 구해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것이 의심의 시작이었는데 그 의심의 끝이 이 허접한 포스팅으로 일단락 되는군요.


덧. 3 글을 쓴지 7년이나 지나서야 이 글의 맹점을 깨달을 수 있어서 덧글로 남깁니다.

찬수관 임명에 관한 것은 제가 실록 편수 때 임시로 설치되는 실록청의 수찬관, 편수관을 상설된 춘추관의 수찬관, 편수관과 동일시 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실록에서는 관원의 관직 임용이 모두 기재된다고 할 수 없고 또 겸직 사항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는 점도 당시에는 간과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실록에서 기록되지 않았던 미싱링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요. 이맥이 실록 상에서는 딱히 두드러지는 일 없이 아주 한미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지 않았다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요. 이 부분은 정정하겠습니다.

다만 그래도 의문은 남습니다. 찬수관, 즉 수찬관을 거꾸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이는 이 관직명은 시정()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으며, 타관()인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 승정원(承政院)의 육승지, 규장각(奎章閣)직제학(直提學)이 예겸()하였다.. 라고 하더군요. 이맥은 실록에 '기록된' 바로는 중종 12년 11월 4일 병자 2번째기사 / 폐조 때 귀양간 자들을 방면하는 일에 관해 논의하다 라는 실록 기록에서의 '가승지' 외에는 수찬관을 겸직할 수 있는 관직과 인연이 없었습니다. 실록 상에서 기록된 중종 연간의 그의 관직은 노비와 관련된 송사를 담당한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호조 참의, 다시 장예원 판결사 정도입니다. 중종 15년에 판결사에서 탄핵될 당시에 그가 수찬관에 임명될 가능성이 실록 기록에는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림들에 의해서 인물됨의 천박함과 일 처리의 독단을 이유로 탄핵이 되었던 당시에 사림들의 영예로 여겨지는 '기록'과 관련된 수찬관에 임용되고도 아무런 잡음이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실린 발해사 관념은 15~6세기에는 도저히 나타나기 어려운 관념이란 점을 간과할 수 없겠죠. 

이맥이 15~6세기 당시의 시대 인식으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발해사 인식을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된다는 점은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by 한단인 | 2009/02/16 14:19 | 역사 | 트랙백(2) | 덧글(22)

트랙백 주소 : http://chiwoo555.egloos.com/tb/229176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한단인의 빈수레 at 2009/02/16 16:35

제목 : 이맥과 태백일사에 대한 사소한 의문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대해 사소하게 까는 글..(일부 수정)트랙백한 글에서 추가로 덧 2를 통해 다음과 같이 쓰긴 했습니다. 덧 2. ...중략... 환단고기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처음 품었던 때인 학부 3학년 즈음에 고성이씨 세계를 조사하다가 행촌 이암과 일십당 이맥의 세계가 직계로 연결되지 않고 이암의 방계 가문에서도 장남이 아님을 보고 어떻게 이맥이 행촌의 단군세기같은 비전 문헌을 구해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의심의 시......more

Tracked from 한단인의 빈수레 at 2009/02/18 19:56

제목 : 보론(?) : 발해고 전에는 발해를 한국사로 생각한..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대해 사소하게 까는 글..(일부 수정)트랙백한 포스팅에서 제가 한 언급 중에 16세기 조선 사족들은 삼한 정통론이란 일반적 인식 때문에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자국사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100% 그렇다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예외는 있을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일반적 인식' 이 그렇다 란 표현을 썼지만 개인적으로 '......more

Commented by 耿君 at 2009/02/16 14:39
사소하게 까시는 것 치고는 양이 많다능 -ㅅ-;;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2/16 14:41
그렇지요? 저도 이렇게 길어질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주장은 별거 없는데 말이 많은 글쓰기 버릇 탓이죠 뭐..
Commented by 耿君 at 2009/02/16 14:44
아이쿠 주장이 별거 없다뇨 ㅎㅎ
제 말은 '사소하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ㅋ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2/16 14:47
초록불님이나 악질식민빠님, Shaw 님에 비하면 제 까는 글은 사소한 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OTL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02/16 15:00
잘 보았습니다. 중요한 지적입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2/16 15:08
아마도 해당 내용에서는 먼저 까신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저 같은 듣보잡도 뒤늦게나마 눈치를 챌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지나가다 생각난 사소한 지적질인데 중요한 지적이라고 하시니 상당히 민망하군요.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02/16 15:29
중요한 건 척살 명단에 확실히 올랐다는 것... (후후)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2/16 15:39
흐힛!!! 저같은 듣보잡까지 신경쓰면 그 사람들은 정말 할일이 없는 거라능..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02/16 16:29
요즘 분위기는 내가 댓글만 달아도 일당으로 몰려서 사살이라능...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2/16 16:35
허걱.. 그럴수가..OTL
Commented by 야스페르츠 at 2009/02/16 15:44
호오... 역시 환단고기는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화수분이로군요. 나오는게 쓰레기라서 문제지. ㅡㅡ;

아무튼 훌륭하신 고찰입니다. 여기에도 오캄의 면도날을 적용시켜 보면 짤 없다능... ㅋ (요새 박영규와 오캄의 면도날 막간극 준비에 정신이 없는 1人)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2/16 15:52
아무리 그래도 저같은 듣보잡 눈에 띌 정도로 허술할 줄은 몰랐지요. 왜 옛날에는 이걸 눈치 못챈건지.. 어흙..
Commented by 크로이 at 2009/02/16 18:56
예전에 보려고 산 환단고기 ( 읽다가 멈춘 ) 를 얼렁 찢어버려야... -_-;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2/16 19:59
저도 두권 있는데 찢어버릴 필요는 아직 못느꼈습니다. 책이 불쌍하잖아요.(엉?)
Commented at 2009/02/17 01: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ㅇㅅㅇ at 2009/09/16 18:40
사족1-조선 시대에 기자를 더 존숭하긴 했지만, 그러다고 단군이 완전히 무시된 건 아닙니다. 일단 누가 뭐래도 고조선의 개국자는 단군이었으니까요. 마리산 참성단에서의 제 역시 사대부들이 그렇게 탓하는데도 꿋꿋하게 버티죠. 심지어는 마리산 참성단 제에서 제의 대상으로 하는 신들 중에 옥황상제 위패도 있으니 뭐...
사족2-삼국유사 기이편에 보면 발해를 한국사의 한 나라로 넣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을 시작으로 위만조선, 마한, 진한, 변한, 발해, 5가야, 북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이 다 실려 있습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09/16 19:29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트랙백된 보론 글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포스팅을 쓸 때에 제가 조금 간과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Commented by 초록불 병신 at 2011/06/29 17:12
ㅉㅉ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6/29 19:42
네 딴에는 지능적인 욕질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Commented by 이정호 at 2016/01/05 22:29
1. 본인은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과 [태백일사]의 저자 괴산 이맥을 편저한 이정호입니다.
이 책은 2013년도에 발행되어 부분적으로 공급 판매되고 있습니다.

2. 본인은 행촌선생과 괴산선생의 직손입니다. 특히, 본인은 괴산선생의 종가(*이맥-이린-이활) 중에서도 종가 후손이고, 한암 당 이유립선생은 차손(*이맥-이린-이방)가의 후손입니다.

3. 본인은 환단시대의 역사를 규명하고자, 25년간을 여러 문헌을 조사하며 탐구기록하였습니다.
이는 [한국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요론을 정립해 국민 모두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4. 본인은 한양에서 선세들이 충청도(*현 세종시)로 입향하여 정착하여 왔고, 이유립선생의 선세들은 삭주에 입향하여 당시의 임진왜란을 피하여 가장된 문헌을 보존할수 있었습니다.
5. 확실한 근거에서 이루어졌으니, 자세한 것은 홈페이를 열어보시기 바랍니다.www.hwandan.kr
Commented by 이정호 at 2016/01/05 23:23
* 전번의 짧은 덧글 페이지에 이어서,

1. 이맥선생에 관한 [태백일사]에 관련된 구절은 좌의정 성세창의 <이맥 신도비>의 기록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맥선생의 [관직생활]에 관한 부분이며, 이맥선생은 초기의 관직에 문과급제 후에 봉정대부 성균관 전적-교서관 교리-예조정랑-종부시 교리 겸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사헌부 장령때(연산군 9년 1503년)에 괴산으로 유배갔습니다.
괴산은 충북의 지명이며 이맥선생이 사마시(진사. 생원 돈시)급제할때에 그의 부친(이지)이 괴산 군수로 재임 당시이고 후에 사헌부 장령 이맥선생은 괴산으로 유배되어 괴산을 자호로 삼았던 것입니다. '일십당'은 괴산선생이 문헌을 학습하던 곳입니다.

2. 본인은 2016년도에 [한국상고사]를 발행할 것립니다. [한국상고사]를 집필 목표로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이암과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을 저술하였으며, 또 이 전체적인 가승으로 전승된 문헌의 경위를 집필하여 마지작 달성을 완성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상고사]는 홈페이지 기타 발간 책자로 국내외에 또 후대에게 영원히 보급될 것이며, 찬란한 조국과 한민족의 뿌리를 전승할 것입니다.

3. 본인의 논문인 대륙사관(민족사관)과 반도사관(식민사관)이 2015년도 행촌학술문화진흥원의 특집으로 발표 되었습니다.
근세조선은 고려사를 많은 부분에서 소중화를 자처하고 왜곡 첨삭하였으며, [삼국사기]조차 안심할 수 업이 왜곡할만큼 의혹을 제기하고 있으며, 고조선등을 서술한 문헌을 세조이래 수거하거나 금서로 하여 근세조선의 왕권강화와 권위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왜정의 총칼로 우리의 상고사에 관련된 역사문헌은 난도질한 것이 <조선사편수회>라는 것을 인식하시고 또한 그역사가 이병도와 그 머리 모자라는 철밥통을 차고 지금까지 우파로서 반도(식민사관)을 더 이상 대륙사관을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국민과 젊은세대와 후손을 속이면서 역사학계를 석권하고 있으며, 더욱 지금은 좌파마저 역사의 이전투구를 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진정 사랑하거나, 역사의 실체적진실을 아는 자신을 위하여 좀더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5. 필요할 경우에 전화하여 올바른 사람의 글과 지도를 통한 노력을 바라며, 010-632-00133 이정호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6/03/09 19:37
블로그가 개점 휴업 상태라서 댓글 쓰신 것을 지금에서야 봤습니다.

저 글을 쓸 때 당시에도 이래저래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누더기 마냥 수정을 가하곤 했는데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보면 또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네요. 그때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부분이 지금에서는 좀 더 눈에 띕니다.

지적하셨던 부분 중 찬수관 임명에 관한 것은 제가 실록 편수 때 임시로 설치되는 실록청의 수찬관, 편수관을 상설된 춘추관의 수찬관, 편수관과 동일시 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실록에서는 관원의 관직 임용이 모두 기재된다고 할 수 없고 또 겸직 사항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는 점도 당시에는 간과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실록에서 기록되지 않았던 미싱링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요. 이맥이 실록 상에서는 딱히 두드러지는 일 없이 아주 한미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지 않았다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요. 이 부분은 정정하겠습니다.

다만 그래도 의문은 남습니다. 찬수관, 즉 수찬관을 거꾸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이는 이 관직명은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으며, 타관(他官)인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 승정원(承政院)의 육승지,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直提學)이 예겸(例兼)하였다.. 라고 하더군요. 이맥은 실록에 '기록된' 바로는 중종 12년 11월 4일 병자 2번째기사 / 폐조 때 귀양간 자들을 방면하는 일에 관해 논의하다 라는 실록 기록에서의 '가승지' 외에는 수찬관을 겸직할 수 있는 관직과 인연이 없었습니다. 실록 상에서 기록된 중종 연간의 그의 관직은 노비와 관련된 송사를 담당한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호조 참의, 다시 장예원 판결사 정도입니다. 중종 15년에 판결사에서 탄핵될 당시에 그가 수찬관에 임명될 가능성이 실록 기록에는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림들에 의해서 인물됨의 천박함과 일 처리의 독단을 이유로 탄핵이 되었던 당시에 사림들의 영예로 여겨지는 '기록'과 관련된 수찬관에 임용되고도 아무런 잡음이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실린 발해사 관념은 15~6세기에는 도저히 나타나기 어려운 관념이란 점을 간과할 수 없겠죠.

이맥이 15~6세기 당시의 시대 인식으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발해사 인식을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된다는 점은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제 글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chiwoo555.egloos.com/2294466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