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 18일
보론(?) : 발해고 전에는 발해를 한국사로 생각한 적 없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대해 사소하게 까는 글..(일부 수정)
트랙백한 포스팅에서 제가 한 언급 중에 16세기 조선 사족들은 삼한 정통론이란 일반적 인식 때문에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자국사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100% 그렇다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예외는 있을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일반적 인식' 이 그렇다 란 표현을 썼지만 개인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낮겠지' 란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그래서 멀쩡한 사람 하나를 가정 상으로라도 별종 취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런데 제가 트랙백 포스팅을 조공으로 바칠 분으로부터 문제제기가 들어왔는데 그걸 본 저는...

그분이 제기한 문제제기는 제가 간과하고 쉽게 넘어가려던 부분에 대해 일종의 경고를 한 셈이었습니다. 즉, 과연 발해고 서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생각한 조선인들이 과연 아예 없을까 하는 문제제기였고 그에 대한 실증증거를 제시해주셨습니다. 그 증거는 1604년에 저술된 '조선세기' 란 책입니다. (조선세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그 책은 1604년 임진왜란 때 명군으로 참전한 오명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조선에 왔을 때 조선 사적을 보고 이 책을 쓴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단군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발해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발해고가 1784년에 쓰여졌으니 대략 180년 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는 조선 사족의 인식이 이미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물론 발해사 부분을 오명제가 반드시 조선의 사찬 사서를 통해 썼을 것이란 확증은 없습니다. 구당서에서 고려별종이란 표현에 꽂혀서 그랬다고도 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그러나 여기서는 조선의 사찬 사서를 통해서 봤다라고 가정하고 논지를 이어가겠습니다.) 즉, 그런 인식이 아예 없다란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제 실수라는 것이죠.
원래 이 책은 제가 2002년에 영인본인 줄을 모르고 영인본으로 나온 것을 구했다가 읽을 능력이 도저히 안되서 김용만 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링크한 글은 그때 조선세기를 읽으셨던 선생님께서 책의 간략한 서평을 쓰신 것입니다. 그때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으로서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드셨고 저도 그 당시에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트랙백한 포스팅을 작성할 때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7년 전 일이니 붕어 대가리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저로서는 그걸 다 기억한다는게 무리인 겁니다... 그런 겁니다...예..) 만약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을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제기로 시작된 트랙백 포스팅을 쓰지도 않았겠지만요.
사실 발해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본 인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다못해 삼국유사에서 직접적으로 그것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발해사를 간략히 언급하고 있고(말갈 부분과 같이 다룬 것으로 봐서 일연 스스로도 긴가민가한 것 같습니다만..) 좀 더 알아보니 안정복은 외기(外記) 형식으로 한국사에서 제외하는 형식이긴 했지만 발해사를 언급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종휘도 발해고보다 4년 앞선 동사(1780)에서 발해사를 남북국 형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간략한 언급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 조금 더 알아보다보니 좀 쇼킹한 걸 찾았는데 그것은 유희령이란 16세기 중엽 인물이 쓴 사찬 사서 標題音註東國史略(1529년 편찬 : 권근의 동국사략과는 다른 책입니다. 유의해주세요. 덕분에 찾는데 헷갈려서 죽는 줄 알았..)에서 이미 발해사를 남북국 영역으로 받아들였다는 식의 내용이 진주 유씨 사이트에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료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인지 아님 진주 유씨 가문에서 임의로 그렇게 서술한 것인지는 사료를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어 확신을 할 수가 없더군요. .(혹시 해당 문헌에 대해 접근할 수 있으신 분이 이 포스팅을 보신다면 유희령 동국사략 발해사 부분에 대해서 언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때문에 이 사료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국편위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을 알고 관련 논문을 찾아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는데 대강 이렇더군요.
이 중에서 제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정구복과 박광석의 논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논문들 상에서는 자잘한 국가 기록들과 같이 다루는 것으로 봐서 삼국유사에서 다룬 수준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다루진 못한 것 같은 인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헌을 직접 본게 아니라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해당 문헌에서 남북국 인식이란 표현이 나타나진 않는 것으로 봐서 진주 유씨 가문에서 임의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실제 경북고 교사이신 박광석 선생님 논문 상에서는 남북국 정도로 볼 정도로 병립된 정통 인식을 가진 것 같진 않다고 서술되어 있군요.) 때문에 아마도 삼국유사나 구당서 발해 기록에서 고구려 별종이란 대목에 꽂혀 간략한 정보를 담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유희령은 사림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나 가문 자체가 훈구 쪽이었던데다 훈구 경향도 상당한 편이어서 다른 사림과 달리 도교나 불교, 시학에 있어서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 사림들이 기피하는 도교 사서나 삼국유사같은 불교 사서를 받아들이는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훈구와 사림의 역사인식 차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덧글로 간략히 서술해 두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참조하세요.)
박광석의 논문에서는 발해사를 가야, 궁예, 견훤과 함께 엮고 이전처럼 신라사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부속사가 아니라 하나의 정식 국가이자 군주로 인식하고 정리해두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런 독립적 서술과 한국사에 포함은 하면서도 '부(附)로 처리한 것은 이들을 주류로 보진 않았다는 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긴가민가하던 것에서 크게 나아가진 않은 상태입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대조영의 건국과 발해군왕 책봉, 국호의 변경과 무왕의 당 공격, 선왕의 전성, 거란에 의한 멸망과 고려 망명에 대한 기술은 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단지 유희령 동국사략이 전체 12권으로서 1권의 내용에 가야, 발해, 궁예, 견훤을 함께 엮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건 기술보다는 사건의 요체만을 간략히 기록되었다는 점이 한계인 듯 했습니다. 물론 문헌을 직접 확인해 봐야 아는 일이니 확신은 금물이긴 합니다.
어쨌든 아마도 명나라 오명제가 1604년에 조선의 사찬 사서를 참조하여 발해 부분의 문장 몇 글자를 서술한 것이라면 유희령의 동국사략을 참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전해지는 조선 사족 문집 중에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한 사료는 아마도 이게 최초가 아닐까 싶어서요. 단지 남북국 인식은 등장하지 않은 듯 싶습니다. 어쨌든 발해고처럼 전문적으로 사건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편제하진 않았지만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인식한 사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셈입니다.(물론 이것은 당대의 주류적 인식에 비하면 가뭄에 콩나듯이 아주 미미할 뿐입니다. 그리고 당장 유희령의 인식은 바로 후대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박광석의 논문에서는 17세기 후반 인물인 허목을 통해 동사 이종휘로 이어지는 라인에 유희령의 동국사략이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 라는 조심스러운 예상을 해보고 있지만 아직 연구가 되진 않은 듯 했습니다. )
그럼 트랙백한 포스팅을 읽은 혹자(라고 쓰고 환빠라 읽는다)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발해고처럼 전문적인 사료수집과 고찰을 하려 했다면 윗 시대부터 꾸준히 한국사 영역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초 인식이 상당 수준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점과 그것을 전문적으로 펴낼 시대적 환경이 계기로 작용되어야 그런 고찰이 가능할 터인데 대진국본기는 밑도 끝도없이 발해고처럼 사건 기록들을 편제하여 서술하고 있으니 뭔가 갑자기 튀어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죠. 물론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사료가 있어서 기초 인식이 꾸준히 쌓이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몰랐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삼국유사로부터 유희령 동국사략까지 대략 300년 동안 그 연결점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이상하지요. 사람의 인식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먼저 경험하고 인식한 것에 의지하여 새로운 것을 재구성하게 마련인데 말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따진다면 대진국 본기가 위에서 제가 말했던 사적이나 혹은 그 사적들에 영향을 미쳤지만 현재는 출몰하지 않는 사료들의 영향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파격적이란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대진국 본기에서는 정통 의식에서 남북국 인식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통은 오로지 발해이고 신라는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걸 조금 더 확대해서 볼까요?
태백일사에서는 이미 고구려국 본기를 다루면서 이것을 정통으로 삼고 백제와 신라를 여기에 포함시켜버렸습니다.(신라사와 백제사는 그나마도 초기에 기원이 어떻다더라 정도의 내용 이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고구려나 발해와의 관계사 내용이 아주 약간 있을 뿐입니다. 이쯤되면 거의 외국이나 오랑캐 취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태백일사가 등장할 당시의 일반적 인식이라면 삼한 정통론에 입각해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에서 따로 분리시켜 봐야할 것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지요. 즉, 태백일사의 서술에서는 신라와 백제를 정통에서 제외시키고 오직 '고구려 쵝오' 만을 따지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라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다고 할까요? 이것이 과연 16세기에 등장할 수 있는 인식일까요?
적어도 18세기 후반에 발해고를 저술하던 유득공도 남북국으로서 정통을 양원으로 분리해 신라를 포함시키려 했지 태백일사처럼 완전 부정하려 하진 않았습니다. 이런 류의 신라 부정적 인식은 단재 신채호 이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던 것입니다.('조선 역사상 1천년래 어쩌구'에서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을 신라 세력(수구) vs 고구려 세력(진취)의 대결로 '해석'하여 국가 이미지에 진보와 퇴보를 각기 투영한 인식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즉, 식민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적 관념을 불태우던 근대 초창기 사학의 인식이 여기에 투영되고 있는 셈이지요.
이맥이 타임머신을 타고서 신채호의 제자가 된다거나, 혹은 발해인이었던 이맥이 16세기 조선으로 타임슬립하지 않는 이상 결코 16세기에는 등장하기엔 불가능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결점 자체가 보이질 않으니까요. 조대기나 진역유기가 실재하여 거기에 발해사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맥이 그것을 보고는 그것만을 전적으로 믿어 인식 자체를 180도 바꾸어 '신라, 백제는 모두 듣보잡인 거임' 이라고 할리가 없지 않습니까? 많이 양보해서 남북국 인식이면 다행인 겁니다. 앞에서 이미 얘기했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것이나 이미 있었던 인식에 기반해 새로운 것을 재구성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얘기가 많이 삼천포로 빠지긴 했습니다만, 우선 이 포스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발해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보는 인식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게 쓴 저의 불찰(솔직히 의도도 없진 않았지만)에 대한 나름의 반성이 주 목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성이 제가 쓴 포스팅에서 태백일사의 사료적 당위성을 역 증명하는 꼴은 아니란 점입니다. 한국사 편입을 막연히 생각하던 움직임은 발해고 이전에도 조금씩 존재했었고 그것이 발해고 저술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순 없지만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처럼 본기로 분류하고 사료를 수집해 기록 공란을 채우려 한 시도는 가능성이 굉장히 낮다는 것입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앞 문장의 전자라기 보다는 후자에 속하지요.
덧. 근데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써놓아도 제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급하게 포스팅을 써서 삽질한 것이 감춰지는 건 아닌 거 같긴 합니다. OTL

뭐... 삽질도 이제 하루 이틀이 아니니 새삼스럽지도 않은 거죠.. (뭐야 임마?)
덧 1. 원래 포스팅을 오늘 오전에 올렸어야 했는데 어제 10시 조금 넘어서 컴퓨터 파워가 날아가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과 겹쳐서 도대체 무슨 악운을 액땜하려고 이러나 싶어서 좀 우울했지요. 암튼 수리점에 맡긴 후 컴 복구를 5시가 넘어서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늦은 시각에나마 포스팅을 올리게 된 점 조공 받으실 분에게 사과드립니다.
덧 2. 포스팅을 읽으시는 분들 중 사장을 중시하는 훈구와 경학을 중시하는 사림의 역사관이 왜 다른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제가 참조한 박광석 선생님의 논문 일부를 대략 정리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훈구는 조정에 출사한 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治人之學에 의거하여 경학(經學)의 바탕 위에 사장(詞章學)에 깊이 유념하는 경향을 지녔는데 이는 조선 초인 15세기에 일련의 국왕권 확립을 위한 정치적 정책과 초기 대명관계의 진전 상황(긴장, 갈등관계가 포함되었음을 주지)과 맞물리는 상황으로 인해 보다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현실에 쓰임이 된다면 불교든 도교든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공리(功利)주의라고 해도 좋겠죠.
사림의 경우 초야에서 성리학 본연의 모습과 유자 스스로의 수양을 중시한 爲己之學에 의거, 경학 그 자체만을 중시하여 보다 폐쇄적 학문 경향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한 이유로 수기치인을 위한 경학의 부수적 존재로서 역사학이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 왕권은 안정 궤도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실 정치를 위한 유연한 사고보다는 성리학적 원칙의 고수의 목소리가 더욱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방에 뿌리를 내린 사림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을 억누르려는 왕실보다 지방 사족의 지주적 이익과 학문적 권위를 더욱 따지게 되었죠.(이 부분을 민족주의적으로 따져서 사족들을 국가도 저버리는 매국노 취급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시는데 당시는 근대 민족주의가 도입된 시기가 아니라 도덕 원칙으로 움직이는 시대라는 점을 주지해 주십시오. 고려를 세운 훈구계열 사족들도 조선왕조 개창을 한 것은 성리학적 도덕질서 확립을 위한 '체제 확립'이 주 목적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족들에게는 당시에 등장하지도 않았던 국가제일주의보다 세상을 움직이는 道(혹은 理)의 실천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道는 도교와 직접적 연관은 없습니다.) 때문에 왕실 정통을 확립하기 위한 역사관으로서 역사를 다루기 보다 상대적으로 사대'명분론'이 더욱 철저하게 입각하게 되고 왕실의 정통보다 [도학(성리학)적 원리 안에서 얼마만큼 중국적 천하질서에 당대 한국사가 충실하였는가]를 인식려는 경향이 컸지요.
트랙백한 포스팅에서 제가 한 언급 중에 16세기 조선 사족들은 삼한 정통론이란 일반적 인식 때문에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자국사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100% 그렇다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예외는 있을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일반적 인식' 이 그렇다 란 표현을 썼지만 개인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낮겠지' 란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그래서 멀쩡한 사람 하나를 가정 상으로라도 별종 취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런데 제가 트랙백 포스팅을 조공으로 바칠 분으로부터 문제제기가 들어왔는데 그걸 본 저는...

앗차! 또 삽질한 건가..
그분이 제기한 문제제기는 제가 간과하고 쉽게 넘어가려던 부분에 대해 일종의 경고를 한 셈이었습니다. 즉, 과연 발해고 서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생각한 조선인들이 과연 아예 없을까 하는 문제제기였고 그에 대한 실증증거를 제시해주셨습니다. 그 증거는 1604년에 저술된 '조선세기' 란 책입니다. (조선세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그 책은 1604년 임진왜란 때 명군으로 참전한 오명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조선에 왔을 때 조선 사적을 보고 이 책을 쓴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단군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발해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발해고가 1784년에 쓰여졌으니 대략 180년 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는 조선 사족의 인식이 이미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물론 발해사 부분을 오명제가 반드시 조선의 사찬 사서를 통해 썼을 것이란 확증은 없습니다. 구당서에서 고려별종이란 표현에 꽂혀서 그랬다고도 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그러나 여기서는 조선의 사찬 사서를 통해서 봤다라고 가정하고 논지를 이어가겠습니다.) 즉, 그런 인식이 아예 없다란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제 실수라는 것이죠.
원래 이 책은 제가 2002년에 영인본인 줄을 모르고 영인본으로 나온 것을 구했다가 읽을 능력이 도저히 안되서 김용만 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링크한 글은 그때 조선세기를 읽으셨던 선생님께서 책의 간략한 서평을 쓰신 것입니다. 그때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으로서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드셨고 저도 그 당시에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트랙백한 포스팅을 작성할 때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7년 전 일이니 붕어 대가리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저로서는 그걸 다 기억한다는게 무리인 겁니다... 그런 겁니다...예..) 만약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을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제기로 시작된 트랙백 포스팅을 쓰지도 않았겠지만요.
사실 발해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본 인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다못해 삼국유사에서 직접적으로 그것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발해사를 간략히 언급하고 있고(말갈 부분과 같이 다룬 것으로 봐서 일연 스스로도 긴가민가한 것 같습니다만..) 좀 더 알아보니 안정복은 외기(外記) 형식으로 한국사에서 제외하는 형식이긴 했지만 발해사를 언급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종휘도 발해고보다 4년 앞선 동사(1780)에서 발해사를 남북국 형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간략한 언급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 조금 더 알아보다보니 좀 쇼킹한 걸 찾았는데 그것은 유희령이란 16세기 중엽 인물이 쓴 사찬 사서 標題音註東國史略(1529년 편찬 : 권근의 동국사략과는 다른 책입니다. 유의해주세요. 덕분에 찾는데 헷갈려서 죽는 줄 알았..)에서 이미 발해사를 남북국 영역으로 받아들였다는 식의 내용이 진주 유씨 사이트에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료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인지 아님 진주 유씨 가문에서 임의로 그렇게 서술한 것인지는 사료를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어 확신을 할 수가 없더군요. .(혹시 해당 문헌에 대해 접근할 수 있으신 분이 이 포스팅을 보신다면 유희령 동국사략 발해사 부분에 대해서 언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때문에 이 사료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국편위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을 알고 관련 논문을 찾아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는데 대강 이렇더군요.
鄭求福, 「16~17세기의 私撰史書에 대하여」, 全北史學 第1輯, 1977 ->해당 논문 a.pdf
朴光錫, 「標題音註東國史略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 歷史敎育論集 32, 2004
-> 이건 파일을 구할 길이 없었는데 어제 학교에서 삽질한 김에 학교 도서관에서 복사했뜸
韓永愚, 「16세기 士林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 東洋學 제10집, 1980
송기호, 「조선시대 사서에 나타난 발해관」, 한국사연구 72, 1991
이 중에서 제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정구복과 박광석의 논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논문들 상에서는 자잘한 국가 기록들과 같이 다루는 것으로 봐서 삼국유사에서 다룬 수준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다루진 못한 것 같은 인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헌을 직접 본게 아니라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해당 문헌에서 남북국 인식이란 표현이 나타나진 않는 것으로 봐서 진주 유씨 가문에서 임의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실제 경북고 교사이신 박광석 선생님 논문 상에서는 남북국 정도로 볼 정도로 병립된 정통 인식을 가진 것 같진 않다고 서술되어 있군요.) 때문에 아마도 삼국유사나 구당서 발해 기록에서 고구려 별종이란 대목에 꽂혀 간략한 정보를 담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유희령은 사림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나 가문 자체가 훈구 쪽이었던데다 훈구 경향도 상당한 편이어서 다른 사림과 달리 도교나 불교, 시학에 있어서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 사림들이 기피하는 도교 사서나 삼국유사같은 불교 사서를 받아들이는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훈구와 사림의 역사인식 차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덧글로 간략히 서술해 두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참조하세요.)
박광석의 논문에서는 발해사를 가야, 궁예, 견훤과 함께 엮고 이전처럼 신라사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부속사가 아니라 하나의 정식 국가이자 군주로 인식하고 정리해두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런 독립적 서술과 한국사에 포함은 하면서도 '부(附)로 처리한 것은 이들을 주류로 보진 않았다는 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긴가민가하던 것에서 크게 나아가진 않은 상태입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대조영의 건국과 발해군왕 책봉, 국호의 변경과 무왕의 당 공격, 선왕의 전성, 거란에 의한 멸망과 고려 망명에 대한 기술은 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단지 유희령 동국사략이 전체 12권으로서 1권의 내용에 가야, 발해, 궁예, 견훤을 함께 엮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건 기술보다는 사건의 요체만을 간략히 기록되었다는 점이 한계인 듯 했습니다. 물론 문헌을 직접 확인해 봐야 아는 일이니 확신은 금물이긴 합니다.
어쨌든 아마도 명나라 오명제가 1604년에 조선의 사찬 사서를 참조하여 발해 부분의 문장 몇 글자를 서술한 것이라면 유희령의 동국사략을 참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전해지는 조선 사족 문집 중에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한 사료는 아마도 이게 최초가 아닐까 싶어서요. 단지 남북국 인식은 등장하지 않은 듯 싶습니다. 어쨌든 발해고처럼 전문적으로 사건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편제하진 않았지만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인식한 사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셈입니다.(물론 이것은 당대의 주류적 인식에 비하면 가뭄에 콩나듯이 아주 미미할 뿐입니다. 그리고 당장 유희령의 인식은 바로 후대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박광석의 논문에서는 17세기 후반 인물인 허목을 통해 동사 이종휘로 이어지는 라인에 유희령의 동국사략이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 라는 조심스러운 예상을 해보고 있지만 아직 연구가 되진 않은 듯 했습니다. )
그럼 트랙백한 포스팅을 읽은 혹자(라고 쓰고 환빠라 읽는다)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숑키.. 포스팅 2개나 써가면서 나불거리더니 결국 개삽질 한거군 ㄲㄲㄲ "
그러나.. 그래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발해고처럼 전문적인 사료수집과 고찰을 하려 했다면 윗 시대부터 꾸준히 한국사 영역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초 인식이 상당 수준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점과 그것을 전문적으로 펴낼 시대적 환경이 계기로 작용되어야 그런 고찰이 가능할 터인데 대진국본기는 밑도 끝도없이 발해고처럼 사건 기록들을 편제하여 서술하고 있으니 뭔가 갑자기 튀어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죠. 물론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사료가 있어서 기초 인식이 꾸준히 쌓이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몰랐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삼국유사로부터 유희령 동국사략까지 대략 300년 동안 그 연결점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이상하지요. 사람의 인식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먼저 경험하고 인식한 것에 의지하여 새로운 것을 재구성하게 마련인데 말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따진다면 대진국 본기가 위에서 제가 말했던 사적이나 혹은 그 사적들에 영향을 미쳤지만 현재는 출몰하지 않는 사료들의 영향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파격적이란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대진국 본기에서는 정통 의식에서 남북국 인식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통은 오로지 발해이고 신라는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걸 조금 더 확대해서 볼까요?
태백일사에서는 이미 고구려국 본기를 다루면서 이것을 정통으로 삼고 백제와 신라를 여기에 포함시켜버렸습니다.(신라사와 백제사는 그나마도 초기에 기원이 어떻다더라 정도의 내용 이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고구려나 발해와의 관계사 내용이 아주 약간 있을 뿐입니다. 이쯤되면 거의 외국이나 오랑캐 취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태백일사가 등장할 당시의 일반적 인식이라면 삼한 정통론에 입각해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에서 따로 분리시켜 봐야할 것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지요. 즉, 태백일사의 서술에서는 신라와 백제를 정통에서 제외시키고 오직 '고구려 쵝오' 만을 따지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라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다고 할까요? 이것이 과연 16세기에 등장할 수 있는 인식일까요?
적어도 18세기 후반에 발해고를 저술하던 유득공도 남북국으로서 정통을 양원으로 분리해 신라를 포함시키려 했지 태백일사처럼 완전 부정하려 하진 않았습니다. 이런 류의 신라 부정적 인식은 단재 신채호 이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던 것입니다.('조선 역사상 1천년래 어쩌구'에서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을 신라 세력(수구) vs 고구려 세력(진취)의 대결로 '해석'하여 국가 이미지에 진보와 퇴보를 각기 투영한 인식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즉, 식민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적 관념을 불태우던 근대 초창기 사학의 인식이 여기에 투영되고 있는 셈이지요.
이맥이 타임머신을 타고서 신채호의 제자가 된다거나, 혹은 발해인이었던 이맥이 16세기 조선으로 타임슬립하지 않는 이상 결코 16세기에는 등장하기엔 불가능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결점 자체가 보이질 않으니까요. 조대기나 진역유기가 실재하여 거기에 발해사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맥이 그것을 보고는 그것만을 전적으로 믿어 인식 자체를 180도 바꾸어 '신라, 백제는 모두 듣보잡인 거임' 이라고 할리가 없지 않습니까? 많이 양보해서 남북국 인식이면 다행인 겁니다. 앞에서 이미 얘기했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것이나 이미 있었던 인식에 기반해 새로운 것을 재구성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얘기가 많이 삼천포로 빠지긴 했습니다만, 우선 이 포스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발해고 이전에 발해사를 한국사 영역으로 보는 인식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게 쓴 저의 불찰(솔직히 의도도 없진 않았지만)에 대한 나름의 반성이 주 목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성이 제가 쓴 포스팅에서 태백일사의 사료적 당위성을 역 증명하는 꼴은 아니란 점입니다. 한국사 편입을 막연히 생각하던 움직임은 발해고 이전에도 조금씩 존재했었고 그것이 발해고 저술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순 없지만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처럼 본기로 분류하고 사료를 수집해 기록 공란을 채우려 한 시도는 가능성이 굉장히 낮다는 것입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앞 문장의 전자라기 보다는 후자에 속하지요.
덧. 근데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써놓아도 제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급하게 포스팅을 써서 삽질한 것이 감춰지는 건 아닌 거 같긴 합니다. OTL

.....
뭐... 삽질도 이제 하루 이틀이 아니니 새삼스럽지도 않은 거죠.. (뭐야 임마?)
덧 1. 원래 포스팅을 오늘 오전에 올렸어야 했는데 어제 10시 조금 넘어서 컴퓨터 파워가 날아가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과 겹쳐서 도대체 무슨 악운을 액땜하려고 이러나 싶어서 좀 우울했지요. 암튼 수리점에 맡긴 후 컴 복구를 5시가 넘어서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늦은 시각에나마 포스팅을 올리게 된 점 조공 받으실 분에게 사과드립니다.
덧 2. 포스팅을 읽으시는 분들 중 사장을 중시하는 훈구와 경학을 중시하는 사림의 역사관이 왜 다른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제가 참조한 박광석 선생님의 논문 일부를 대략 정리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훈구는 조정에 출사한 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治人之學에 의거하여 경학(經學)의 바탕 위에 사장(詞章學)에 깊이 유념하는 경향을 지녔는데 이는 조선 초인 15세기에 일련의 국왕권 확립을 위한 정치적 정책과 초기 대명관계의 진전 상황(긴장, 갈등관계가 포함되었음을 주지)과 맞물리는 상황으로 인해 보다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현실에 쓰임이 된다면 불교든 도교든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공리(功利)주의라고 해도 좋겠죠.
사림의 경우 초야에서 성리학 본연의 모습과 유자 스스로의 수양을 중시한 爲己之學에 의거, 경학 그 자체만을 중시하여 보다 폐쇄적 학문 경향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한 이유로 수기치인을 위한 경학의 부수적 존재로서 역사학이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 왕권은 안정 궤도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실 정치를 위한 유연한 사고보다는 성리학적 원칙의 고수의 목소리가 더욱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방에 뿌리를 내린 사림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을 억누르려는 왕실보다 지방 사족의 지주적 이익과 학문적 권위를 더욱 따지게 되었죠.(이 부분을 민족주의적으로 따져서 사족들을 국가도 저버리는 매국노 취급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시는데 당시는 근대 민족주의가 도입된 시기가 아니라 도덕 원칙으로 움직이는 시대라는 점을 주지해 주십시오. 고려를 세운 훈구계열 사족들도 조선왕조 개창을 한 것은 성리학적 도덕질서 확립을 위한 '체제 확립'이 주 목적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족들에게는 당시에 등장하지도 않았던 국가제일주의보다 세상을 움직이는 道(혹은 理)의 실천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道는 도교와 직접적 연관은 없습니다.) 때문에 왕실 정통을 확립하기 위한 역사관으로서 역사를 다루기 보다 상대적으로 사대'명분론'이 더욱 철저하게 입각하게 되고 왕실의 정통보다 [도학(성리학)적 원리 안에서 얼마만큼 중국적 천하질서에 당대 한국사가 충실하였는가]를 인식려는 경향이 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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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2/18 19:56 | 역사 | 트랙백 | 덧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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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 내세요. 저는 심지어 1년 반 전에 한 삽질을 뒤늦게 땜빵하고 있답니다 ㅠㅠ
암튼 삽질 땜빵이 일상이다보니..;;;
http://library.snu.ac.kr/DetailView.jsp?uid=11&cid=144818
그러나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만큼 유명하지가 않네요.
아무튼 이렇게 수정 보완하면서 암중모색하는 것이 역사학이라는 학문이니까, 잘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틀리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을 고치지 못하는 거지요. 최근 이X일 선생이 잘 보여주고 있두만요.
책 팔아 번 돈으로 잘 먹어서인지 얼굴이 아주 후덕해지셨더군요.
'역사서술이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와는 아주 다른 관점을 제시했음은 물론이고, <삼국유사>에 비해 보더라도 더욱 진취적인 면모가 확인된다. 그 좋은 예가 <삼국유사>에서도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발해사를 다룬 데 있다. 분량은 얼마되지 않지만, 고구려의 남은 장수 대조영(大祚榮)이 태백산 남쪽에 씩씩하게 근거를 잡아 나라를 세웠다는 연원을 밝히고, 끝으로 고려 태조 8년에 "온 나라가 손을 잡고 우리 서울 찾았다"고 해서, 발해가 민족사의 판도 안에 든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해명했다.'
그런데 태백일사의 경우는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한국사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격이 높여 남북국의 양원적 정통론으로 계승하는 것을 넘어서서 발해사로서 한국사 정통을 아예 교체하려는 인상을 피우는 게 걸리더군요.
암튼 해당 부분은 수정을 해야겠습니다.
일단은 신구당서에서 발해의 위치를 애매하게 설명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발해사는 국가사의 영역으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발해사를 완전히 한국사로 보는 것이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 관계자와 다른게 뭔가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국가사의 영역으로 치환되기에는 근대 이전 역사 영역이라는게 너무 모호한 면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