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 로그인  


신라 촌락문서로 본 고대 생산력 추계에 관한 찌질한 고찰

조선전기 인구논쟁에 대한 소고

트랙백한 강희대제님 글의 원 주제인 조선 전기 생산력 추계를 통한 인구 부양력 추론과는 별개로 부기된 삼국시대 생산력 추론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을 본햏은 뒤늦게 보게 됐는데 논쟁을 보면서 문제제기 일부는 동의, 혹은 이해를 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문서를 통해 추계한 통일신라 당대의 생산력 연구를 언급하신 부분이었다. 다음의 글은 당혹스러웠던 부분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을 풀어본 글이다.

미리 일러둘 말은 쓰고보니 본햏의 이 글이 뭔가 결말이 흐지부지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다 자멸한 글이란 점이다. 대체 왜 쓴걸까 싶다가도 쓴게 아까워서 욕먹을거 알면서도 그냥 올려분다.

1.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을까?

트랙백된 글에 댓글을 통해서 고구려 인구 추계에 대한 강희대제님의 견해에 일정한 반박 댓글을 남겨두었으니 굳이 본문에 부기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히 셋으로 요약하면 만주 일원에 걸쳐있는 고구려 영토와 부속된 부락들의 생산력에 대해 강희대제님이 간과하신 측면이 있음이 첫째요(단위면적당 생산력은 떨어지나 절대면적이 넓다는 것이 상쇄하는 측면), 4세기 쯤 등장하는 고구려식 농구 개량으로 만주·한반도 북부에 최적화된 농사 체계를 갖추고 생산력을 향상시킨 고고학적 정황이 둘째요, 5세기부터 반등된 기후 상승으로 6세기 중반부터 현재보다 따뜻해진 당시 상황은 전반적인 작물 생산성 증가, 이용 가능한 경지면적 증가로 인해 이전보다 월등한 생산력·인구 증가가 있었을 정황이 셋째다.

정황에 불과해도 기후 상승은 변수가 많이 발생하기에 정말 냉정히 말했을 때 ‘뭐라 말하기 어렵다’라는 정도가 본햏과 강희대제님이 쌍방 간에 동의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고구려를 제외하고서 신라나 백제 같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생산력 추계는 강희대제님이 말한 식의 문제제기가 일정 부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고려 말 조선 전기부터 보편화된 연작상경 농법이 과연 삼국시대에 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항상 진보하는 것은 아니기에 고려 때 휴한농법이라 해서 삼국시대에 그보다 못했다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급할 수 있다. 다만 성급하다고 지적을 하는 것이 그 자체의 부정은 아니다. 지속된 생산인 연작상경 농법이 가능하려면 거름을 토지에 투입해 지력 유지가 되는 게 관건인데 고구려는 가축 보유량이 신라, 백제에 비해 월등해 축분을 통한 시비 투여율이 둘에 비해 높은 편이다.(대신 목축에 사용될 단위토지면적은 농경보다 커서 전체 토지면적에서는 상쇄되며 축분은 양에서 인분에 비할 바 못된다.) 그러나 신라나 백제는 고구려와 같다 할 수 없고 인분 사용 흔적은 현재로썬 확인된 바가 없기 때문에 냉정히 얘기하면 ‘아직 알 수 없다’ 가 현재 내릴 수 있는 답일 것인즉(가능성도 좀 떨어지기에 그런 고로) 이것을 백제 호구 76만호를 부양할 생산력의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때문에 고려의 휴한 농법 단계의 생산력을 상한선으로 잡고 그에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 문제의 관건일 것인데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상업교류를 통해 외부에서 식량을 사올 가능성을 따져보는 문제일 것이다.

외부에서 식량을 대량으로 사와 국가 구성원을 부양하는 전근대의 사례가 없진 않다. 지중해 세계에서 아테네는 자국 내 식량 생산력으로는 인구를 지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이집트의 밀을 대량으로 사와 비농업 인구를 부양한 사례가 있고 이는 동로마 제국 시기까지 이 지역의 식량 수급에 중대한 부분으로 작용했다. 로마의 제정 전환 전후로는 (외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지만 안정된 식량확보선의 예시로서) 속주의 대농장에서 거둔 잉여 식량 유입으로 로마 본토 내부의 자영농이 몰락한 사례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백제나 신라도 로마나 아테네와 같은 맥락의 식량수입이 있다고 할 순 없지만 식량수입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가능성을 열어두는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증명을 해야하는 부분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조선에 비하면 역동적인 상업활동을 했던 삼국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문헌으로는 상업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실질적인 물동 유통량을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유통 주체도 명확히 확인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유통 주체가 조공무역으로 대변되는 국가 내지는 지배 상층부라고 말한다면 교역물의 대상은 식량·옷감 같은 생필품이 아닌 위세품과 그것을 교역할 사치 물자의 확보가 될 것이다.(상층부도 생필품을 다룰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유인이 떨어지지 않을까?) 때문에 민간 상인의 활동이 증명되어야 하고 식량과 교환이 가능한 물자 확보를 이들이 하고 있었는가도 증빙되어야 한다.(물론 이것은 식량 유통 기록이 확보되면 굳이 할 필요는 없다)

한편 식량을 방출하는 지역으로 볼 수 있는 중국과 일본의 상황도 살펴봐야한다. 팔 식량이 변변치 않다면 사는 것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잉여 식량이 부족하다고 해서 식량을 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아일랜드에서 주식인 감자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도 대체 식량을 살 자금이 없었던 하층 농민들은 굶어 죽은 반면 팔 공급처가 없던 식량 상인들은 되려 잉글랜드에 식량을 팔았다. 다만 이 경우는 특수한 경우이고 일본이나 중국의 경지 이용과 그에 따른 식량생산 사정을 감안했을 때 당시의 여력이 부족했다면 식량이 반출될 가능성은 그만큼 떨어진다고 봐야할 것이다.(그러나 백제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 이전에는 아직 강남의 경지 개발이 완료되지 않았고 일본열도도 외부 인구 유입이 꾸준할 정도로 경지개발이 완료되지 않아서 경지부족으로 인한 잉여식량 반출이 어렵다고 할 순 없다.)

가장 증명하기 어려운 것은 위의 조건들을 충족한다고 해도 어느 수준까지 물량을 공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아테네 사례는 도시국가로서 전체 인구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고 동로마 제국 때를 말한다고 해도 지중해라는 천혜의 해운 조건이 황해와 같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물류비용 증가로 연결되며 부피는 큰 대신 가치는 떨어지는 식량이 상품으로서의 매력을 민간상인들이 느끼기 어렵게 만들어 대상인·귀족에 의해서나 주도됨을 의미한다. 소수에 의해 운용된다면 앞서 언급한대로 상품 유인성이 떨어져 출자하는 대상인·귀족의 수도 걔중 소수이며 따라서 전반적인 물자 유통량이 한정적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특수한 사례가 아니고는 기록이 잘 안남아 증명도 어렵다. 분명한 건 상인에 관한 기록은 동양권 사료에서 잘 안 남기지 않던가?) 또한 로마는 다수의 속주에서 대농장 경영을 통한 안정적인 식량 유통선이 확보가 되어 있었는데 백제·신라도 그랬을지 의문이다. 중국이나 일본 열도 내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식량 확보가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또 농민을 상대로 식량을 사다 먹일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비 농업인구(상인·공인·해민(어부))를 대상으로 한 식량수입이 염두되는데 그 인구가 농업인구에 비해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할지도 문제가 된다. 로마 제정 시작 전후로 대농장으로 인한 자영농 몰락으로 도시 빈민으로서 중우정치의 희생양이 된다거나 군대로 입영하는 것이 백제·신라가 같다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즉, 증명하는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어려운 측면이 있고 확률이 꽤나 낮아서 가능성을 열어두는 부분이라면 모를까 확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식량수입을 염두에 두어도 그것이 지중해 세계와 같이 높은 비중으로 인구 부양을 감당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강희대제님의 이런 문제제기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언급이라 할 것이다. (물론 본햏이 위에서 정리한 의문은 여지가 남는다는 면에서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2. 당혹스러운 측면 - 신라 촌락문서에 수록된 생산성 문제

큰 맥락에서 강희대제님이 제기한 일종의 의혹은 고구려를 제외하면 본햏으로서도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부분이었다. 고구려 사례와 달리 백제와 신라는 병력규모를 통한 인구 환산조차도 쉽지 않은 형편이기 때문이다.(고구려 원정 때 신라가 동원한 20만 대군 사례가 있지만 과장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 제외한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강희대제님이 든 한가지 근거를 보면서 본햏은 아찔함을 느꼈다. 신라 촌락문서를 토대로 통일신라 시기의 생산력이 조선전기의 15분에 1 밖에 안된다고 하신 것이다. 조선 전기의 토지 생산력도 막 연작상경단계에 들어선 만큼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님에도 15분의 1의 생산력이라면 거의 유목 수준의 토지 이용률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건 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따라서 인용하신 연구가 있다면 알려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댓글로 회신이 왔다.


李泰鎭 : 예, 우선 그 문제는 각 村別 戶數의 평균 田ㆍ沓結數가 10結 내지 15結에 달하고 있는 점부터 고려되어야 할 것 같읍니다. 이 평균치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읍니다만, 그 過多性은 우선 지금까지 '孔烟'을 自然戶로 본데도 문제가 있읍니다. 이를 編戶로 보고 自然戶의 想定數를 따로 산촐하여 戶當 結數를 구해 보면, 4~9結 정도가 되어 과다성은 어느 정도 해소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朝鮮初期의 일반 家戶가 대부분 1~2結 정도라는 상태에 비교하면 수긍이 가기 어려운 점이 그대로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高麗時代에도 一易田ㆍ再易田 등이 많다는 기록을 중시하여 이 문서의 田ㆍ畓도 休耕을 전제하여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이태진 외「토론 : 정창원 발견 신라촌락문서에 관하여」, 『역사학보』 86 , p.166






회신을_본_본햏의_심정.JPG



댓글 토론 때 15분의 1 경지 이용률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통계해석 상에서 과격했다고 생각을 하셨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한발 뒤로 물러나셨다. 또 역개루 카페에서 다른 분이 지적하신대로 서원경 일대의 한정된 사례를 전체로 확대해서 보는 것이 부당한 점도 간과하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그럼에도 위 토론문을 보며 일말의 찝찝함은 남았다. 토지 결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댓글을 보니 ‘공연’에 대한 해석을 자연호인가 편호인가 하는 논란이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촌락문서에 기재된 1호당 인구수가 5인 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본햏이 가지고는 있지만 학부 때 가장 듣기 곤혹스러웠던 한국사회경제사 수업의 교재(논문 짜깁기- 해당 부분은 김종선. <일본 정창원소장 신라장적의 작성년도와 그 역사적 배경>. <<아시아문화>> 5, 1989.)에서 민정문서 관련 부분을 공부하다 짜투리 시간에 조금씩 살펴보았다. 통계 정리된 것을 보니 4개 촌별로 평균 호구수가 다르긴 했는데 대략 호당 평균 인구가 10~11인으로 나왔다. 조선 전기의 양상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1호당 5인 가족이라고 한다면 대략 2호에 해당하는 토지가 필요하게 된다. 단순 계산으로 조선 전기 1호당 평균 토지결수 1.5 X 2호로 3결이 되는데 일역전이니 재역전이니 하는 휴한농법을 기준으로 놓고 봐도 6결·9결로 위 사례와 제법 차이가 난다.

단순히 농법이 후져서라고 하기에는 또 찝찝함이 남았다. 어찌된 영문일까 하며 다른 요인이 없을까 학부 교재를 뒤적거려보니 민정문서가 쓰여진 시기를 추론한 부분이 눈에 띄였다. 민정문서는 본문 기재된 ‘을미년’에 대한 해석을 놓고 서술 시기에 대한 견해가 갈리는데 대체로 755년 설과 815년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본햏이 참고한 논문에는 815년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875년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급격한 인구 감소와 인구 이동을 전거로 들고 있었다. 민정문서 상에서 4개 촌락이 일관되게 그렇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심한 촌락의 경우 3년 만에 인구의 30%가 사망 내지는 이주로 인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고립화된 변방 촌락에서 보이기에 어색한 것이다. 한가지 더 어색한 것은 이 4개 촌락들 모두 정남(丁男) 비율이 대단히 낮다는 점이었다. 정녀(丁女)에 비해 3분의 2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일반 민이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삼고 있었다. 즉, 9세기의 사회적 혼란상이 민정문서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이 전제가 맞다면 토지 결수가 왜 그렇게 '개판'인지 조금은 이해가 갈 법도 했다. 8세기 후반 혜공왕 사후 붉어진 지배 상층부의 권력 쟁탈로 전국이 정치적 혼란과 내란을 겪고 잦은 천재지변이 일어나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위에서 언급된 인구 유동성 증가 내지는 감소가 발생했고 (초적 발생 혹은 이를 막기 위한 군사 징발로 인한) 정남 수 부족으로 인한 노동력 저하로 경작 연속성이 저하된 것이다. 여기에 8~9세기의 심화된 천재지변(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상황을 더욱 부채질 하여 토지 생산성의 저하라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인구수는 부족한데 황무지가 널려있는 상황이다.  

조금 무리한 추론이긴 하지만 논문상으로는 적어도 815년과 875년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큰 듯 했다. 일단 토지황폐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 싶은데 그 흔적으로 7세기 후반부터 한반도 중남부에는 천재지변이 잦았거나 그로 인한 기근이 잦았던 기록이 산견된다.(8세기 외계충격가설에 대한 사소한 소회-자유로픈님께 바치는 조공) 특히나 민정문서가 기록된 서원경이 위치한 서쪽 변방에서 천재지변과 기근이 두드러져 기록이 남은 사례가 788년과 815년 때 보이고 있다.(815년에는 기근으로 인한 초적까지 서쪽 변방에서 발생했다.) 한편으로 그리고 1호당 인구가 평상시의 2배나 되는 까닭도 일종의 인구유랑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민정문서 내에는 타지에 있는 처를 따라 1호가 내성의 허가를 받고 이주한 사례가 있는데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이 흩어졌거나 혹은 여유가 되는 처가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경우 의도하지 않게 대가족이 되는 사례가 잦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본다면 조선 전기에 비해 1호당 토지결수의 차이가 극명하게 차이가 난 점은 9세기 때 총체적으로 등장한 토지 생산성 악화와 서변주에 더 심한 양상으로 나타난 점, 또 호당 인구수가 조선 전기와 단순 비교할 성질이 아니란 차이가 있지 않나 했다.


3. 일종의 반전 - 촌락문서 서술 시점의 논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찝찝함을 정리한 뒤 포스팅으로 남기려고 했으나 어떻게 보면 논문 하나만 보고 모든 것을 정리한 셈이 되는지라 또다른 찝찝함이 남았다. 사실 민정문서 서술시기는 썰이 난무한 만큼 9세기 초나 말이 아니면 위에서 본햏이 생각했던 구도가 무너지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다른 논문을 하나 더 참고해보기로 했다. 바로 윤선태 교수가 1995년에 쓴 [정창원 (正創院) 소장 (所藏) 「 신라촌락문서 (新羅村落文書)」의 작성연대 - 일본의 『 화엄경론 (華嚴經論)』 유통상황을 중심으로] 란 논문이었다. 그런데 논문 결론부터 보고 난 본햏은 일종의 아스트랄한 상태에 빠졌다. 



왜냐면 그 논문은 민정문서 서술 시점을 695년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결론부터_먼저_본_본햏의_심정.JPG



그야말로 ‘이거 뭥미?’ 란 심정으로 본문을 찬찬히 보려 했으나 불교사 이해라고 해봐야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본햏이 봐 본들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다’, 혹은 ‘여긴 어디인가? 난 누구인가?’ 수준의 반응 밖에 나오지 않았다.(뭐야 임마?)


본문을_보고있는_본햏의_심정.JPG



그나마 이해가능한 영역에서 그 논문을 봤을 때 요지는 이러했다. 촌락문서가 나오게 된 경위를 보면 정창원 소장물 중 신라에서 건너온 화엄경론을 보완하기 위해 덧대어진 종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인데 고로 이 화엄경론의 유통경로를 추론하면 촌락문서의 서술 시한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이때 촌락문서 서술시기는 화엄경론 보완시기보다 빠르다는 전제가 있다.) 여기서 화엄경론은 계통이 몇 개가 있지만 정창원 화엄경론의 경우 영변이란 승려가 쓴 것일 확률이 크며 이것은 751년 사망한 신라 승려 심상이 사경한 판본이 정창원에 흘러갔을 가능성이 컸다고 정창원 소장품 반입 목록 기록을 추적해 논문에서 서술하고 있다. 달리 심상의 판본 말고 다른 것이 유입될 가능성도 있지만 이 화엄경론은 9세기 일본에서는 거의 수요가 없던 계통이라 9세기에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 촌락문서 시한을 8세기인 755년으로 봐야할 것인데 이때 윤선태 교수는 당시에 당나라의 문서 작성에서 연(年)을 세(歲)나 재(載)로 쓰는 것이 관례로 신라도 그것을 따랐을 가능성이 크고 심상의 사망연도도 751년이니 촌락문서 서술 시점을 755년도 가능성에서 제외하여 695년으로 보고 있었다. (다른 논거도 더 있지만 일단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주요 논지로 언급된 것이 이 부분인 듯 하다.)

어쩐지 좀 이상한 소거법인데다 가능성이 크다 정도를 일말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너무 확정적으로 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다른 경로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695년으로 보면 무려 50년이나 넘은 공문서를 냅뒀다가 불경 보수용으로 쓴다는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진성당거사님 댓글을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 싶다.) 그렇다고 755년으로 보기에는 신라 장적상에 기록된 사회상이 8세기 양상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당시는 경덕왕 말년으로 농민 분화나 사회적 혼란이 가시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무시하려고 생각도 해봤지만 적어도 앞서 본햏이 보았던 김종선의 논문 요지였던 875년 설은 무너질만한 이유가 윤선태의 논문에 있었다. 바로 840년의 장보고 사망 이후 신라-일본 간 교역관계가 적대관계로 돌아서면서 9세기 후반이 되면 거의 단절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논문에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875년 설은 버리기로 하고 815년 설을 취하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오히려 815년이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3년마다 한번씩 호구조사와 물자 확인을 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행정체계가 일정하게 돌아간다는 반증이다. 만약 875년이라고 한다면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때와 맞지 않게 된다. 그러나 815년이라면 이때는 초적이 발생하고 부분적인 지역 민란이 막 일어났지만 부분적 사건이기 때문에 행정체계가 유지되는 교집합 상태가 맞아떨어진다. 또한 농민 유랑 및 농민분화로 인한 부민, 노비 발생이 아직까지 초기적 분화에서 가까운 양상이라는 것도 얼추 맞는 듯 싶다. 아울러 연수유답에 포함된 촌주위답의 비율이 다른 호 평균치보다 큰 차이가 나게 많은 것이 아닌만큼 아직까지 촌주가 변방에서 권력을 갖추고 성주로 행세하기에는 세력이 미약해 보인다. 물론 천재지변·기근은 앞선 시기부터 있었고 이때는 그로 인한 사회적 엔트로피가 증가된 상태다.  따라서 행정체계의 온전과 사회적 난맥상이 공존하는 815년으로 촌락문서 서술시기를 보는 것이 적확해 보이며 고로 9세기 초의 악화된 사회상과 토지생산력으로 삼국시대 전반을 아우르는 지표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정도로 결론을 내릴까 한다.


추가 : 마지막 결론부분은 쓰고 난 후에야 알게 된 팩트의 확인으로 논지 자체가 붕괴됨을 알게 되어 이에 정정합니다. 자세한 것은 추가 변명글 [
 신라 촌락문서로 본 고대 생산력 추계 삽질 정정합니다. ] 확인하시면 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윤선태 교수의 논지가 맞습니다. 이유는 윤선태 교수가 박사논문 쓰기 이전에 697년 설에 썼던 載 용례 외에 박사논문 단계에서 역법 상에서 정월(正月) 규정 변화 흔적과 관련한 사료를 확보하여 근거로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의 변명은 697년을 상정하고서 저따위로 왜 토지이용율이 개판인가를 고찰하는 일종의 정신승리(응?)에 가까운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덧 1. 암만 그래봤자 윤선태 교수의 전제가 맞으면 말짱 도로묵.. OTL(..)


덧 2. 강희대제님이 댓글에서 언급하신대로 1결은 절대 면적이 아닌 생산량 기준에 따른 상대 면적이니만큼 조선 전기 1결하고 통일 신라 때 1결하고 다르다고 찌르면 결국은 좆망...

...그럼 뭐 신라 때 농법이 고려 휴한 농법 수준은 될꺼라고 배째고 서원경 특수사례 갖고 약팔지(엉?) 말라고 뻗대는 수 밖에.. OTL





결론을_낸_본햏의_심정.JPG


후... 될대로 되라지..OTL

by 한단인 | 2011/03/29 10:31 | 역사 | 트랙백(1) | 덧글(23)

트랙백 주소 : http://chiwoo555.egloos.com/tb/314272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한단인의 빈수레 at 2011/04/06 10:09

제목 : 신라 촌락문서 생산력 추계 삽질 정정합니다.
조선전기 인구논쟁에 대한 소고신라 촌락문서로 본 고대 생산력 추계에 관한 찌질한 고찰며칠 전 강희대제님의 포스팅 논지 일부에 신라 촌락문서 내용을 근간으로 한 고대 생산력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거기에 반론하는 포스팅을 썼다. 반론 포스팅의 대체적인 논지는 김종선의 89년 논문을 근간으로 하여 촌락문서가 9세기 초나 후반에 쓰여졌고 당시 몇 세기나 지속된 기후 악화와 정치적 혼란이 중첩되어 각지의 농민반란이 성행해 토지생산성이 지속되지 못했을 가......more

Commented by 강희대제 at 2011/03/29 10:51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12:16
헛.. 벌써 댓글을...;;;

올라오자 마자 보신건가요..?
Commented by 진성당거사 at 2011/03/29 12:29
잘 읽었습니다. 윤선태 교수의 얘기는 예전에 읽어봤었는데, 저 연대추정은 뭔가 믿기가 어렵더군요. 추론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지만 뭔가 부족한 듯한 생각입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12:32
부족한 듯한 생각이 드셨다면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신 것인지 혹 알 수 있을런지요? 저로서는 본문에서 쓴 애매한 이유가 고작인지라... OTL
Commented by 진성당거사 at 2011/03/29 12:39
저도 지적하신 부분과 크게 의견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폐지 재활용에 대한 것이라면.....50년보다 훨씬 후덜덜한 연대 차이가 나는 종이 재활용 사례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자주 보이지요.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12:47
아.. 그렇군요.

폐지 재활용에 대해서는 닥종이 품질이 상당히 우수한 고로 연대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쓰이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은 지적하신 대로 입니다.

다만 제가 그렇게 생각을 한 까닭에는 윤선태 교수의 언급대로 27년 정도의 연한을 최대로 잡아 정부 기록 보관 후 폐기 조치를 해서 재활용을 한 것이라면 그 이후에 어디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쓰였을텐데 20년 정도의 연한이 남아 있다 쓰인게 좀 께름찍해서 말이지요.

이는 제 상식에 근거한 추론인데 유사한 사례에 제가 무지한 만큼 몰라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제가 말씀드린 대로 폐기 이후 한참 후에 재활용되는 사례가 꽤 많은가요? 조선조의 경우 사초를 세초해서 재활용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 경우는 어떨런지...
Commented by 진성당거사 at 2011/03/29 14:19
배접지의 경우 정말 연대차이가 자주 나는 경우가 생기지요. 구체적인 사례는 지금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조선 중기의 공사문서가 18-19세기의 책 배접용으로 쓰인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 중에 전운옥편 (정조 때 간행)의 경우만 따져도 그 배접지로 만력 몇 년 운운하는 종이가 쓰였습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19:40
아.. 그렇군요. 그럼 그 얘기는 폐기처분을 해야할 듯..
Commented by 앨런비 at 2011/03/29 12:51
저건 역개루 토론 연장선이니 거기에 올려도 될듯효. 그리고 또 백플단위의 키배가 일어나겠지. 오호 통제라. 갠적으로 백제의 76만호는 백제가 멸망직전 신라를 몰아붙여 낙동이서를 거의 장악한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중입니다아.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12:53
음.. 일단은 강희대제님과의 토론이라서 여기서 이미 보셨으니 카페는 굳이 올리지 않아도 될까 싶었는데... 따로 양해를 구해봐야겠군요.

근데 또 100플 키배라면 저는 그냥 강건너 구경이나 해야겠습니다. OTL
Commented by 앨런비 at 2011/03/29 12:56
글고 글 확인속도는 네이트온 플러그인을 달면 초고속으로 됩니다. 우리 짜장씨도 네이트온 이용자라서 그런듯.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12:57
아..

저는 네이트 이용을 잘 안해놔서..ㅎㅎ
Commented by 강희대제 at 2011/03/29 19:14
네이트온 플로그인이랑 연동 안했습니다.
Commented by moduru at 2011/03/29 16:09
촌락문서에는 호당 가축두수도 많아요.
저 문서는 보면 볼수록 아스트랄합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19:39
그게 저도 좀 의아하긴 하더라구요.
Commented by 나츠메 at 2011/03/29 17:45
1. 지금까지 드러난 사료와 연구성과에 의하면, 한반도의 고대 국제무역은 상류 계급(귀족)의 자국 내 잉여생산물 착취(란 개념은 생존과 단순재생산의 위한 몫을 제외한 나머지 부가가치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함.)에 의한 결과물임. 따라서 끼니를 겨우 이을 수 있는 농민이 수입 농산물을 구매할 수도 없고, 상인이 그들의 위해 농산물을 수입할 필요도 없음.

결국 모든 잉여 자원을 수취하고 분배하는 귀족계급과 정부가 국제무역의 주체가 되는데, 국가나 귀족은 관용품과 사치품이 주 수요인 만큼, 상인들의 농산물 수입 요인이 매우 낮음.

물론 농민이 잉여 생산물의 재원인 만큼 정부나 귀족이 각자 관할하는 농민을 위해 자원 재분배를 할 수 있으나, 교통수단의 미발달로 "지금 당장" 구호가 필요한 시점에 외국 농산물이 "제 때"에 당도하는 건 불가능. 창고에 식량자원을 미리 가지고 있어야 긴급 구호가 가능한 것임. 그렇기 때문에 <의창>이니 <진대제>니 하는 제도가 있는 거심.


2. 본문에서 고대 아테네나 제정 로마를 고대 한반도와 비교하고 있는데, 논자의 사회/경제적 고찰이 부족하다고 판단됨.

먼저 고대 아테네의 경우, 농업이 중요 산업이 아닌 상업이 주요 산업으로 "수입 농산물의 소비자"는 농촌에 사는 농민이 아닌 "농산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상인과 노동자임. 기근으로 아테네 교외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적으면 정부나 상인이 농산물을 수입해서 다른 상인과 노동자들에게 팔면 됨. 즉 도시 시민층 그 자신이 수요자이면서 공급자란 말씀.

그리고 제정 로마의 경우, 로마 제국 전역이 "로마라는 하나의 경제 지구로 통합"이 되었음. 따라서 로마 제국 내의 무역은 국제 무역이 아닌 "국내 교역" 또는 "역내 무역"임. 이는 로마 시가 농업 도시에서 상업과 무역으로 개편되고 식민주들에서 농업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분업 체제"에 근간한 것. 즉 로마의 자영농이 이윤율이 낮은 농사를 때려치고 영세 상인이나 노동자로 변신하는 한편 상업과 서비스 등으로 번 돈을 통해 식민지의 농산물을 사 먹는 것이라 할 수 있음.

따라서 고대 그리스와 제정 로마에서 각각 식량을 수입/이입하였다고 해서, 고대 한반도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은 말이 안되는 거임.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20:25
1. 말씀하신 부분때문에 저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직은 유보적으로 봐야할 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2. 아테네 사례는 제가 너무 간략히 언급한 부분이 없지 않네요. 실은 본문에서 한반도 사례를 말하면서 비농업 인구를 언급했던 것은 아테네 사례가 떠올라서이긴 했는데 설명을 부기하지 않은 잘못은 있는 듯 싶습니다.

그리고 제정 로마 사례도 지적하신 대로 국내 교역과 국제 교역 구분 없이 무분별하게 대조시킨 잘못이 있군요. 일단은 안정적인 식량확보선의 예시로서 제정 '시작 전후'의 로마 속주를 일종의 외국으로 놓고 얘기를 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논지를 훼손할 정도로 장황한 설명이 될까 싶어 설명을 단순하게 했는데 지적하신 걸보니 이 부분은 제 잘못입니다.

본문에서는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게 썼는데 로마 제정 시작 전후기와 아테네 사례가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하게 일어났다라고 말하려던 것이 아닌 식량수입에 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라는 의미였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해당 부분은 분명히 수정을 해야겠습니다.

다만 안정적인 식량 확보선으로서 일본열도 내에 있던 백제계 호족들의 잉여농산물이 백제 본국과 교역될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긴 한데(위세품이나 사치품으로 교환된다거나.. 근데 그러자면 백제계 호족 있던 곳에서 백제계 위세품이 다량 출토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은.. 관련 사례를 모르니 저는 잘 모르겠...) 안정성 여부는 차치하고서 그게 가능하더라도 어느 정도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문제가 남는지라 그 부분도 좀 유보적이긴 하죠.
Commented at 2011/03/29 19: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29 20:33
1. 말씀하신대로 좀 아스트랄한 여지가 있는 듯 싶습니다. 근데 저게 호당 균등하게 배속이 된 것인지 특정 호구에 집중된 것인지 정확치는 않은 듯 싶고, 어쩌면 저렇게 호구당 결수가 많은 것이 마필에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더군요.


2. 학부 때 사회경제사 따위 너무 어려워서 쳐다도 안봤다가(뭐야 임마?) 이번에야 촌락문서의 그 헬게이트를 보았는데 말씀하신대로 '이건 미친 짓이야! 여기서 나가야겠어!'를 저도 외쳐야 할 듯 싶습니다.
Commented by 나츠메 at 2011/03/29 21:46
"백제계 호족들의 잉여농산물이 백제 본국과 교역될 가능성 언급"

이 부분은 제가 고대사 전공이 아닌 터라 접해보지 못 했던 부분입니다. 고대 경제-무역에 있어 참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참고문헌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30 00:25
저도 자세한 얘기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사석에서 얘기를 들은 것으로 연구서나 논문에 실린 사례가 아니고 (견문이 짧아 확답할 것은 못되지만 제가 아는 한 아직은 정식 거론된 바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작업가설로서 언급이 되는 정도로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업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를 일부 확보했다는 얘기로 당시 사석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제가 자세한 언급없이 가능성으로 언급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조만간 그와 관련한 연구서가 나올 것이니 기다려 볼 밖에요.

아직은 확실치 않은 얘기를 근거인 양 말씀드린 감이 있으나 일말의 여지는 있는 얘기인 것은 분명하기에 언급드립니다.
Commented by 만슈타인 at 2011/03/30 14:39
흠 고찰하다 아스트랄계로 가신 듯 --;;;
Commented by 한단인 at 2011/03/30 23:24
헬게이트인 줄 알았다면 빠지지 않았을 것을...OTL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