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12일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1 - 호족연합정권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발해 수령의 성격이 지방에서 상당한 자치적 권력을 영유하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느낌에 수령이란 존재의 성립에 관한 시간적 맥락과 관련기록을 살펴볼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우선 발해 수령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은 일본 기록인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등장하니 다음과 같습니다.(원문은 도원님 블로그에서 납치)
"또 재당학간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개별천황7년 고려왕 고씨가 당에게 멸망 되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동서남북이 각기 2천리이며,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延袤 : 延는 동서 길이, 袤은 남북 길이.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유취국사는 일본의 대당 유학승인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 845∼903)가 892년에 편찬한 사료입니다. 그러나 발해조 부분은 8세기 초엽부터 발해를 방문한 일본 사신의 견문기를 참고로 하여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따라서 유취국사의 이 기록은 발해 건국 초의 사정을 담아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중에 눈여겨 볼 문장은 其下百姓皆日首領 란 부분입니다. 그에 대해서 해석을 '그 아래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그럴 경우 '그 아래' 란 수식어를 굳이 붙일 이유가 없으므로 '그 아래를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 라고 해석하여 도독과 자사 아래의 하급 지방관리를 수령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방관의 종류를 도독과 자사, 수령의 3단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 아래를 '모두' 라고 한 것으로 봐서 '모두' 란 표현이 2개 이상의 복수형임을 감안했을 때 지방관은 4개 단계 이상으로 구성되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지요. 이 점은 737년 당을 방문한 발해 '대수령' 목지몽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수령에도 일정한 단계와 급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수령 기록은 당과 일본에서 외번의 '추장'들을 일컫는 용어라서 실제 발해가 관명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어색합니다. 적어도 발해 스스로의 기록도 아니니까요. 발해 백성들도 자사 이하의 존재들을 뭉뜽거려 표현하는 것으로 봐서 수령이 율령에 입각한 정식 명칭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추가로 서술하겠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無州縣官驛 란 부분과 도독, 자사가 엄밀한 의미의 지방 관리라기 보다 촌장의 일종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두 부분을 연결시켜보면 엄격한 율령체제에 입각해서 중앙이 지방으로 '내려보낸' 지방관료라고 이해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발해 중앙 조정에서 지방에 대한 엄격한 율령 지배체제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거나 있어도 전반적으로 강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나중에 밝히겠지만 이는 발해 전역의 사정을 대변하진 않습니다)
의문점은 또 있습니다. 프롤로그에 밝혔듯이 발해의 대 일본 관계 사료들에 자주 등장하는 지방관리인 수령이 항시 무역과 외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무역 참여 사실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위치가 지방분권 체제 하의 재지세력가이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는 이미 프롤로그에서 간략히 밝혔습니다.)
유취국사에서 나타나는 수령의 성격이 만일 지방분권적인 성향이란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기록이 발해 초기 사정을 대변하는 것인 만큼 발해 건국과정과 초기 정치의 시간적 맥락을 검토함으로써 수령 성격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신구당서 발해전을 기본으로 논의를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구당서)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旣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중략)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衆及高麗餘燼, 稍稍歸之.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디 고려의 별종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식솔)을 느리고 영주로 옮겨 기거하였다. 만세통천(萬世通天696~697) 때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더불어 각기 망명하였던 무리들을 통솔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수비하였다.(중략) 대조영은 날래고 용감하여 군사를 잘 부렸는데 말갈의 무리와 고려의 유민들이 점차 그에게 돌아갔다.
(신당서)
萬歲通天中, 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 有舍利乞乞仲象者, 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 度遼水, 保太白山之東北, 阻奧婁河, 樹壁自固. 武後封乞四比羽爲許國公, 乞乞仲象爲震國公, (중략) 祚榮即並比羽之衆, 恃荒遠, 乃建國, 自號震國王, 遣使交突厥, 地方五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 頗知書契, 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중략) 玄宗開元七年, 祚榮死, 其國私諡爲高王. 子武藝立, 斥大土宇, 東北諸夷畏臣之,
만세통천 중 거란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를 살해하고 반란하자 사리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려의 나머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쪽에 의지하여 거처하며 오루하의 험준함에 힘입어 나무로 벽을 쌓아 스스로 엄히 수비하였다. 무후가 걸사비우를 봉하여 허국공으로 삼고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삼아 그들의 죄를 사면하여 주었다. (중략) 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아우른 뒤 황량하고 먼 곳인 점을 믿고 이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 돌궐과 교류하였으니, 땅이 사방 5천리(?) 호구 수가 10여 만, 날랜 군사가 수만이며 자못 문자를 알고 있다. 부여와 옥저 및 변한과 조선 등의 바다 북쪽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중략) 현종 개원(713~741) 7년에 조영이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고왕이라 시호하였다. 아들 무예가 즉위하여 땅을 크게 넓히자 동북의 여러 이족들이 두려워 그에게 신하가 되었다.
거란족 이진충이 요서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영주에 살던 고구려 유민과 계통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갈인 집단이 영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집단은 요수를 건넌 뒤 태백산 동북과 오루하 사이라는 애매한 지점에 도착하여 독립된 세력을 이루다가 이해고가 이끄는 당 토벌군에 의해 크게 패했지요. 이 사건으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 둘 다 사망하고 걸걸중상의 아들이라는 대조영이 무리를 수습해 동모산으로 이동해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멸시키고 나서 발해를 건국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발해 건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사료는 그 사건 중에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인데 파란색으로 된 부분을 주목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구당서의 맨 처음에 쓰여진 '가속' 이란 표현에 주목을 한다면 처음 영주에 대조영 가문이 정착했을 당시 대조영 가문은 어느 정도 규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갈계 당 장수 이근행의 아버지인 속말 말갈 돌지계가 수나라에 항복할 때 그가 이끌고 온 부족 수천인을 '가속'이라고 한 예를 생각해보면 이 경우도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대조영의 출자를 속말계라고 보는 신당서 기록을 생각해 본다면 고구려 중앙정계에 포섭된 속말말갈계 집안으로 대조영 가문을 설정했을 때 그 가문이 일정 수준 규모를 가진 집단이라고 유추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치가 돌지계의 경우와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왜냐면 대조영 가문이 영주에서 탈출했을 때 말갈인 지도자인 걸사비우 집단에 속하지 않고 고구려 유민 집단의 장으로서 나선 것으로 본다면 대조영 가문이 속말계라고 하더라도 고구려 중앙정계에 포섭된 지는 상당한 시일이 지났고 속말계 부족집단의 족적 유제도 많이 약화되어 사실상 고위 관료가 거느리는 소수 가병 정도로 '가속'이 설정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아 봐야 수백명 단위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신당서의 '속말말갈' 계라는 기록은 발해 건국지역이 과거 속말말갈의 거주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규모라고 봐야겠지요)
그렇다면 영주를 탈출할 때에도 고구려 유민집단은 대조영에게 일방적으로 포섭된 집단이 아니라 대조영 가문과 같은 군소 집단들의 연합체로 출발한 것일 가능성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이 집단의 지도자로서 고구려의 유력 귀족이나 왕족이 내세워지지 않은 것은 영주 내에 유력 귀족이나 왕족이 없는 탓이거나 탈 영주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어쨌든 영주에서 출발한 고구려 유민집단 외에도 걸사비우를 중심으로 하는 말갈인 집단도 함께 영주를 나섭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구당서 인용문에 두번째로 파랗게 된 '각기' 통솔했다란 표현을 보면 이들은 당군의 위협에 대해 일시적으로 전략적 동맹을 맺었던 것 뿐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측천무후에게 각 지도자가 따로 봉작을 받은 것으로 봐도 별개의 집단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후 이들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의 공격으로 패주하여 각 집단 지도자 둘 모두 전사하는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따라서 이전의 단순한 전략적 동맹관계가 아니라 하나로 합쳐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새로운 집단의 수장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인 대조영이 지도자가 되어 무리를 수습한 뒤 결국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대파하고 동모산에서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비록 말갈인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보장해줄 수 있는 속말계 고구려인이 수장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말갈인 집단과 고구려 유민집단은 영주 탈출 후에 별개의 정치집단이었습니다. 갈라선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면 건국과정에서 말갈인 집단이 지분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그 전에 양 집단은 어느 한 정치집단이 주류를 이루는 형태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즉, 양 대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군소집단들이 이해관계 충족을 위한 충돌이나 지분 요구를 어떤 식으로든 분명히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발해 건국 초기에는 왕실이 전제권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인데? 란 생각이 들지 않으신가요? 후한의 경우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등학교 국사 수업을 들으신 분들은 어딘가 모르게 고려 초기의 '호족 연합정권' 과 그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분을 요구하려는 집단은 이것에 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진짜 호족같은 호족들은 다음에 서술할 집단의 장들입니다.
ps. 교원임용고시 준비로 인해 11월 초까지는 당분간 블로그를 잠시 접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뒷 내용이 궁금하신 분께는 죄송스럽군요.
# by | 2008/08/12 20:36 | 역사 | 트랙백 | 덧글(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