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 로그인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1 - 호족연합정권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프롤로그)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발해 수령의 성격이 지방에서 상당한 자치적 권력을 영유하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느낌에 수령이란 존재의 성립에 관한 시간적 맥락과 관련기록을 살펴볼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우선 발해 수령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은 일본 기록인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등장하니 다음과 같습니다.(원문은 도원님 블로그에서 납치)

"또 재당학간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개별천황7년 고려왕 고씨가 당에게 멸망 되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동서남북이 각기 2천리이며,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은 적다. 모두 토인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延袤 : 延는 동서 길이, 은 남북 길이.


유취국사는 일본의 대당 유학승인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 845∼903)가 892년에 편찬한 사료입니다. 그러나 발해조 부분은 8세기 초엽부터 발해를 방문한 일본 사신의 견문기를 참고로 하여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따라서 유취국사의 이 기록은 발해 건국 초의 사정을 담아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중에 눈여겨 볼 문장은 其下百姓皆日首領 란 부분입니다. 그에 대해서 해석을 '그 아래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그럴 경우 '그 아래' 란 수식어를 굳이 붙일 이유가 없으므로 '그 아래를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 라고 해석하여 도독과 자사 아래의 하급 지방관리를 수령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방관의 종류를 도독과 자사, 수령의 3단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 아래를 '모두' 라고 한 것으로 봐서 '모두' 란 표현이 2개 이상의 복수형임을 감안했을 때 지방관은 4개 단계 이상으로 구성되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지요. 이 점은 737년 당을 방문한 발해 '대수령' 목지몽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수령에도 일정한 단계와 급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수령 기록은 당과 일본에서 외번의 '추장'들을 일컫는 용어라서 실제 발해가 관명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어색합니다. 적어도 발해 스스로의 기록도 아니니까요. 발해 백성들도 자사 이하의 존재들을 뭉뜽거려 표현하는 것으로 봐서 수령이 율령에 입각한 정식 명칭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추가로 서술하겠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無州縣官驛 란 부분과 도독, 자사가 엄밀한 의미의 지방 관리라기 보다 촌장의 일종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두 부분을 연결시켜보면 엄격한 율령체제에 입각해서 중앙이 지방으로 '내려보낸' 지방관료라고 이해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발해 중앙 조정에서 지방에 대한 엄격한 율령 지배체제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거나 있어도 전반적으로 강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나중에 밝히겠지만 이는 발해 전역의 사정을 대변하진 않습니다)

의문점은 또 있습니다. 프롤로그에 밝혔듯이 발해의 대 일본 관계 사료들에 자주 등장하는 지방관리인 수령이 항시 무역과 외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무역 참여 사실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위치가 지방분권 체제 하의 재지세력가이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는 이미 프롤로그에서 간략히 밝혔습니다.) 

유취국사에서 나타나는 수령의 성격이 만일 지방분권적인 성향이란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기록이 발해 초기 사정을 대변하는 것인 만큼 발해 건국과정과 초기 정치의 시간적 맥락을 검토함으로써 수령 성격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신구당서 발해전을 기본으로 논의를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구당서)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旣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萬歲通天年, 契丹李盡忠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領亡命東奔,(중략)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衆及高麗餘燼, 稍稍歸之.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디 고려의 별종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식솔)을 느리고 영주로 옮겨 기거하였다. 만세통천(萬世通天696~697) 때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더불어 각기 망명하였던 무리들을 통솔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수비하였다.(중략) 대조영은 날래고 용감하여 군사를 잘 부렸는데 말갈의 무리와 고려의 유민들이 점차 그에게 돌아갔다.

(신당서)

萬歲通天中, 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 有舍利乞乞仲象者, 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 度遼水, 保太白山之東北, 阻奧婁河, 樹壁自固. 武後封乞四比羽爲許國公, 乞乞仲象爲震國公, (중략) 祚榮即並比羽之衆, 恃荒遠, 乃建國, 自號震國王, 遣使交突厥, 地方五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 頗知書契, 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중략) 玄宗開元七年, 祚榮死, 其國私諡爲高王. 子武藝立, 斥大土宇, 東北諸夷畏臣之,
만세통천 중 거란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를 살해하고 반란하자 사리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려의 나머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쪽에 의지하여 거처하며 오루하의 험준함에 힘입어 나무로 벽을 쌓아 스스로 엄히 수비하였다. 무후가 걸사비우를 봉하여 허국공으로 삼고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삼아 그들의 죄를 사면하여 주었다. (중략) 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아우른 뒤 황량하고 먼 곳인 점을 믿고 이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 돌궐과 교류하였으니, 땅이 사방 5천리(?) 호구 수가 10여 만, 날랜 군사가 수만이며 자못 문자를 알고 있다. 부여와 옥저 및 변한과 조선 등의 바다 북쪽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중략)
현종 개원(713~741) 7년에 조영이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고왕이라 시호하였다. 아들 무예가 즉위하여 땅을 크게 넓히자 동북의 여러 이족들이 두려워 그에게 신하가 되었다.

 

거란족 이진충이 요서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영주에 살던 고구려 유민과 계통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갈인 집단이 영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집단은 요수를 건넌 뒤 태백산 동북과 오루하 사이라는 애매한 지점에 도착하여 독립된 세력을 이루다가 이해고가 이끄는 당 토벌군에 의해 크게 패했지요. 이 사건으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 둘 다 사망하고 걸걸중상의 아들이라는 대조영이 무리를 수습해 동모산으로 이동해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멸시키고 나서 발해를 건국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발해 건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사료는 그 사건 중에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인데 파란색으로 된 부분을 주목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구당서의 맨 처음에 쓰여진 '가속' 이란 표현에 주목을 한다면 처음 영주에 대조영 가문이 정착했을 당시 대조영 가문은 어느 정도 규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갈계 당 장수 이근행의 아버지인 속말 말갈 돌지계가 수나라에 항복할 때 그가 이끌고 온 부족 수천인을 '가속'이라고 한 예를 생각해보면 이 경우도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대조영의 출자를 속말계라고 보는 신당서 기록을 생각해 본다면 고구려 중앙정계에 포섭된 속말말갈계 집안으로 대조영 가문을 설정했을 때 그 가문이 일정 수준 규모를 가진 집단이라고 유추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치가 돌지계의 경우와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왜냐면 대조영 가문이 영주에서 탈출했을 때 말갈인 지도자인 걸사비우 집단에 속하지 않고 고구려 유민 집단의 장으로서 나선 것으로 본다면 대조영 가문이 속말계라고 하더라도 고구려 중앙정계에 포섭된 지는 상당한 시일이 지났고 속말계 부족집단의 족적 유제도 많이 약화되어 사실상 고위 관료가 거느리는 소수 가병 정도로 '가속'이 설정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아 봐야 수백명 단위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신당서의 '속말말갈' 계라는 기록은 발해 건국지역이 과거 속말말갈의 거주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규모라고 봐야겠지요)

그렇다면 영주를 탈출할 때에도 고구려 유민집단은 대조영에게 일방적으로 포섭된 집단이 아니라 대조영 가문과 같은 군소 집단들의 연합체로 출발한 것일 가능성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이 집단의 지도자로서 고구려의 유력 귀족이나 왕족이 내세워지지 않은 것은 영주 내에 유력 귀족이나 왕족이 없는 탓이거나 탈 영주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어쨌든 영주에서 출발한 고구려 유민집단 외에도 걸사비우를 중심으로 하는 말갈인 집단도 함께 영주를 나섭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구당서 인용문에 두번째로 파랗게 된 '각기' 통솔했다란 표현을 보면 이들은 당군의 위협에 대해 일시적으로 전략적 동맹을 맺었던 것 뿐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측천무후에게 각 지도자가 따로 봉작을 받은 것으로 봐도 별개의 집단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후 이들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의 공격으로 패주하여 각 집단 지도자 둘 모두 전사하는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따라서 이전의 단순한 전략적 동맹관계가 아니라 하나로 합쳐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새로운 집단의 수장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인 대조영이 지도자가 되어 무리를 수습한 뒤 결국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대파하고 동모산에서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비록 말갈인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보장해줄 수 있는 속말계 고구려인이 수장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말갈인 집단과 고구려 유민집단은 영주 탈출 후에 별개의 정치집단이었습니다. 갈라선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면 건국과정에서 말갈인 집단이 지분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그 전에 양 집단은 어느 한 정치집단이 주류를 이루는 형태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즉, 양 대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군소집단들이 이해관계 충족을 위한 충돌이나 지분 요구를 어떤 식으로든 분명히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발해 건국 초기에는 왕실이 전제권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인데? 란 생각이 들지 않으신가요? 후한의 경우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등학교 국사 수업을 들으신 분들은 어딘가 모르게 고려 초기의 '호족 연합정권' 과 그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분을 요구하려는 집단은 이것에 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진짜 호족같은 호족들은 다음에 서술할 집단의 장들입니다. 


- 다음에 계속 -                


                 
ps. 교원임용고시 준비로 인해 11월 초까지는 당분간 블로그를 잠시 접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뒷 내용이 궁금하신 분께는 죄송스럽군요.

by 한단인 | 2008/08/12 20:36 | 역사 | 트랙백 | 덧글(12)

『88만원 세대』에 대한 문제제기 - 단결과 인센티브 지급

희망은 존재하는가-『88만원 세대』

Sigmund 님 말대로다. [최소한의 복지 시스템과 뜨뜻미지근한 사민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정책들까지 싸잡아서 좌파들의 책동이라고 비난하며 최소한의 소통과 의견수렴마저 거부하는 세력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란 상황으로 88만원 세대에서 우석훈 박사가 주장한 것은 탁상공론이란 말까지 들을 정도가 되었다.(물론 글을 쓰고 있는 본햏은 그렇게 생각치는 않으나) 확실히 그의 글에서는 대안에 대한 서술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서술이 상당히 약한 편이다. 책 표지에 쓰인 '짱돌을 집어들고 바리케이트를 쳐라' 란 대목은 게으른 군당국자로 하여금 표지만 보고도 불온서적이라고 낙인찍히게 할 정도로 직설적이지만 너무도 전통적인 이미지다.

물론 우석훈씨는 텍스트에서 그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실행 방법론으로 '단결'이란 다소 전통적인 방법을 제시했다.(적어도 난독증 환자에 가까운 나로써는 그렇게 인지되었다.) 단지 그 형태가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확실히 자기 모순된 악순환의 사슬을 끊을 방법은 단결적 저항이 유일한 것 같다는 것이 머리 나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답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시대는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가 아니라 21세기라는 200년의 시차를 내고 있다. 더이상 폭력은 체제를 바꿀 힘이 되진 않는다. 힘의 균형과 제어장치가 마련되어가면서 폭력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있고 상식과 명분이 가지는 힘은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결의 전제와 도구는 더 이상 폭력이어서는 안된다. 어디까니나 상식과 정당한 명분(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 지는 차치하더라도)만이 유일한 힘이다. 그렇다면 비상식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는 현 정권에 대한 단결의 전제와 도구를 상식과 명분에서 찾는다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환경은 '어느 정도(확실히가 아닌)' 갖춰진 셈이다.

 그런데 폭력을 일으키기 이전에, 상식과 명분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이미 단결을 시킬 수 있는 방법도 현 시점에서는 난항을 겪고 있다. 지금은 포디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 분화되면서 각 계층마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 시대에 단결이란 말이 공허하다는 것 정도는 좌파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경제학 개론 수업을 듣는 대학교 학부생에게도 이미 낡은 언어가 될 정도로 뻔한 사실이다. 지금의 정권에서 벌이는 정말 비상식적 행위로 인해 촛불이란 형태로 잠시나마 이해관계 대립이 주춤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그 전망은 밝지 못하다. 역시 분화된 계급의 이해관계와 개인적 처지로 인해 단결이 점차 요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언론 플레이를 들지 않더라도 촛불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서)가 점차 커지는 것이나, 촛불에 대한 일반 시민의 관심이 점차 시들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에 벌어진 교육감 선거의 결과는 대표적인 예인 것 같다. 촛불이 사그러진 것 같이 보이는 이 상황에서 정치적 희망이 꺾인 뒤에 정치에 대한 환멸이나 더욱 더 깊은 무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싶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이놈의 정권이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을 목도하면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경험한 터라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단결하지 않는가?

원래 대중이라고 묶여진 집단은 사실 동일한 개체들의 합으로 이뤄져있지 않다. 그것은 포디즘 체제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노동 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계급 대립 상에서 갈등의 초점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갈등이 아니었다면 본질적으로 대중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 포스트 포디즘 체제에서 이런 대중 해체적 상황은 더욱 심화된다. 애초에 동질적이지 않은 집단이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분화된 노동계급간의 이해관계 분리로 더욱 더 동질적이지 않게 된 것이다.

계급의 분리는 집단의 규모를 작게 만든다. 작은 규모의 집단은 큰 덩치를 갖고 있는 지배계층에게 덤벼든다는 것이 겁이 난다. 유일한 방법은 단결이지만 여기서 작은 집단은 몇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첫째는 바로 이해관계 문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동계급의 분화로 한쪽 계층의 이익이 다른 한쪽에게는 심각한 손해로 작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경우 대척점에 선 두 집단은 아주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단결하지 못한다.

둘째는 첫째 고민에서 연결된다. 바로 단결의 대상인 다른 작은 집단들이 연합하지 않을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 즉, 자신의 대척점에 선 반대편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배계층과 동조할 경우 승산이 낮아지는 것이다.

셋째는 마찬가지로 연결된다. 승산이 낮아지면 질수록 지배계층에게 당할 보복의 수위와 강도가 높아지고 그것이 자신에게 집중될 확률도 높아진다.

넷째는 목표와 성과물(인센티브)의 명확성이다. 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달콤한 꿀이 눈 앞에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해야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정책이나 대안이 좋더라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것이라거나 제대로 인지되지 못하게 된다면 공감을 불러일으키긴 어렵다. (88만원 세대를 읽은 많은 20대들 중 상당수가 - 물론 이 글을 쓰는 본햏조차도 제대로 행간을 읽어냈다고 할 순 없겠지만 -  그 행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우석훈 씨가 의도한 결과보다는, 도리어 세상에 대한 염세적 인식이 강화되는 등의 다양하고도 엉뚱한 결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따라서 집단의 생존에 아주 직접적인 손해를 미치지 않는 경우라면 이해관계의 침해 정도가 중간에 서 있는 집단은 대체로 참여와 단결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즉, 우석훈 씨가 아무리 사회 구조의 모순을 폭로하고 다안성이란 좋은 대안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저항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꿀이 직접적으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한, 그 위협에 대한 경계선을 넘어서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한은(얘기를 거꾸로 한다면 꿀을 '생존 위협'으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대중은 참여하지도 않고 따라서 단결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슬프지만 인간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행 방법에 대한 방향을 찾는다면 아주 원론적인 얘기로 돌아가는 것 같아 김빠지지만 역시나 대량의 '꿀'을 눈 앞에 들이미는 서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생존 위협에 대한 폭로도 한 방법이지만 이미 우석훈씨가 쓴 방법이고 또한 20대의 일부에만 해당되는 폭로인지라 단결과는 거리가 있다. 그 20대들조차도 행간을 잘못 읽거나 염세적으로 빠진 부류가 많은 걸 생각해보면 그리 적당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ps 1. 이 구조는 국가간 '적대적 공범자' 구조에서 피지배 시민들이 지배자의 지배 헤게모니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전략 출발점으로 써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사실 그거 읽다가 스치듯 떠오른 거니까 

ps 2. 쓰고보니 되게 길게 썼다. 이런 엉터리 뻘글을 이렇게 길게 쓰다니.. 이거도 재주라면 재주..(30분 정도 소요되었으니 공부 지장은 크게 없어 다행)

...발해 수령 포스팅은 어쩌지? 일요일에는 좀 쉬니까 그때 써야할텐데..으윽..

ps 3. 이 엉터리 뻘글을 쓰고 잠깐 읽어봤는데.. 결론인 즉, 언론플레이 해도 된다는 요상한 결론이 나왔다. 역시 엉터리 뻘글

by 한단인 | 2008/08/06 21:21 | 시사 | 트랙백 | 덧글(9)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프롤로그)

밤에 잠은 안오고,, 공부도 되다 말다 이러고.. 마침 삼천포로 빠지던 와중에 글빨이 쥐뿔만큼 오르는 와중에, 이때 아니면 언제 포스팅할 여가가 나겠나 싶어서 포스팅합니다. 쓰고보니 서설에 불과할 뿐인데 지나치게 길군요. 모르면 말이 길어지고 어리석으면 변명만 늘어난다던데.. 걱정입니다. 어쨌거나 이거 쓰고 나서 다음 내용은 언제 쓸 수 있을까요? 일단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일 크게 벌이는 건 아닌지..(또또,..이러네요. 거의 병입니다 병..)

====================================================
재일 사학자 이성시 교수가 쓴 책 중에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이란 책이 있습니다. 제가 학부 3학년 땐가 처음 읽었죠. 아마도 실질적으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생긴 건 그 책을 읽고 나서였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그 책에서 신라, 발해의 대일본 교역에 관한 내역이라던가 사정이 상당히 재미났던 터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발해사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고 아는 것도 거의 없었죠. 이후에 동 저자의 <<만들어진 고대>>란 책도 읽고 난 뒤 발해사에 대해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마 발해사 부분에서 제 생각이 일본 학계의 입장과 많이 닯은 데에는 이성시 교수의 책을 먼저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의아하게 여겼던 것은 발해의 '수령' 이란 존재였습니다. 일본 사료인 <<유취국사>>에서 지방관의 대명사거나 하위 지방관으로 해석되는 이 존재가 대일본 외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의외로 큰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방관이면 지방관이지 왜 외교 사절에 따라가는 걸까? 란 의문이 들었죠. 중앙에서 외교 전담 부서의 하위 관리라면 이들이 따라가서 각종 잡무를 보러 가야하는 것은 맞겠지만, 지방을 다스려야 할 지방관이 외교사절 따라가면 그 지역 행정은 완전히 마비가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지방관이 아닐 가능성은 낮아보입니다. 바로 '首領'이란 단어 자체의 의미 때문입니다. 외교 관서의 하위 관리들, 혹은 일반적인 하위 관리에게 붙이는 명칭으로는 상당히 어색합니다. 보통 수령의 의미를 단어 그대로 해석하여 '무리의 우두머리' 라고 한다면 씨족장이나 부족장 같은 자치적 집단의 장으로써 大人이란 단어와 통하는 면이 있다면 더더욱 아니겠죠.(물론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대인은 집단 구성원에게 덜 권위적이고 수령은 그보다는 보다 권위적인 뉘앙스가 있습니다) 단어 자체의 의미만 본다면 이들은 분명한 지방관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지방 행정을 뿌리치고 대외 교역에 참가한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발해사 문외한인 학부 3학년생인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그 수령들 중에서 말갈인 수령이 다수였기 때문에 말갈족 부락의 장들을 교역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즉, 발해 조정에서 대외 무역에 대한 중개권을 통해서 말갈을 통제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명이 여진이나 몽골의 유력 부족들에게 조공권(교역권)을 한정적으로 나눠주는 방식으로 명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 하거나, 일본 에도막부에서 쇄국 정책을 통해 각 번들이 자율적으로 대외교역해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고 중개권을 권력으로 삼아 번들을 통제하는 식이죠. 발해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제에는 발해가 군사력으로 말갈을 통제하지 못하고 각 부족의 자율성이 의외로 대단히 높다란 결론이 나옵니다. 때문에 다분히 민족주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저로써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결론이었습니다. 중앙집권과 통일로 귀결이 나야하는 민족주의적 시각, 달리 말하면 근대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한에서는 말이죠. 하지만 통일과 중앙집권, 근대적 진보가 반드시 지상과제가 될 순 없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령의 자율성이 높다란 것을 지방분권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라면, 왜 그러한지에 대한 구조 맥락을 캐치해야하는데 듣보잡인 제가 뭔수로 알수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당연히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갔을 뿐...]


그러다가  임용공부 차원에서 신라 하대와 발해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던 최근에서야 어렴풋이 '이런게 아닐까?' 하는 낚시성 망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낚시성 망상'이란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진지하면 지는겁니다?(응?)


두달 전쯤 서강대에서 벌어졌던 '전국 역사학 대회' 때 내놓으라 하는 여러 출판사에서 각종 인문서적과 역사서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었지요. 그때 친구 놈들 책사는 양에 귀 얇은 저도 몇권 사는데 당시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상하권도 샀었습니다. 그 책을 보면서 정리를 하던 와중 신라 촌주와 고구려, 백제의 지방관을 비교하는 대목을 보고 재밌다 여기던 참이었습니다. 신라 촌주의 권력이 같은 재지 세력으로써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약한 이유가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部의 성립 배경이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신라 6부는 6村에서 비롯되었고 고구려의 5부는 5개 那, 즉 5개 소국 연합체란 규모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왕경인 집단의 폐쇄성을 결정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읽다보니 동시대 지방관, 혹은 재지 세력으로서 발해 수령과 신라 촌주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겠다란 생각이 들지 뭡니까?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자율성이란 측면에서 그 둘은 너무도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몇년 전 품었던 의문도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연쇄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둘이 격이 완전히 맞는 것이 아니긴 합니다만 그 의문 때문에 발해 수령의 자율성의 근원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 다음에 계속 -                        

by 한단인 | 2008/08/03 02:31 | 역사 | 트랙백(1) | 덧글(6)

아..환장하겠다능...

요 며칠 새 블로그를 안들어가서 구독신청된 이웃분들의 포스팅을 잠깐 읽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분들에게서 아주 다양한 이유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환장할 지경이네요. 염장(?)이나,, 촌철살인(?)의 답변,,, 포스팅 내용의 심후함에서 나오는 경외감(응?)..등등 아주 아주 여러가지 이유로 정신적 데미지를 받다보니...








우울하군요.









ps. 촌철살인의 답변 중 저의 심금을 울리던 것은



'체질에 안맞아서 여자친구도 없으신가봅니다?

신도의 가슴에 대못을... (텨텨텨~) '





...차마 아니라고는 말을 못했다능..OTL




..쳇..

by 한단인 | 2008/08/02 23:24 | 트랙백 | 덧글(10)

이 상태로는 블로그가 개점휴업 상태가 될 것 같다능..

저번 잡담에 언급한대로 임고 1차 시험이 한달 땡겨진 까닭에 블로그 조차도 출입이 쉽지가 않네요. 오늘로써 99일되는 날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마음이 초조해졌달까.. 포스팅하기가 점차 꺼려지는 군요. 작년에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포스팅할 거리는 늘어나고 있는데 막상 쓰지는 못한게 대여섯개는 되는 거 같습니다. 당장 발해 수령 낚시건도 있는데.. 시간 되는대로 쓴다고 하고선 여즉 쓰질 못하고 있군요. 마한 떡밥도 쓰다가 말아놓고는.. 일은 벌여놓고 수습이 안되는게 심해지는 거 같네요.

by 한단인 | 2008/08/02 20:24 | 트랙백 | 덧글(7)

잡담 28 - 별로 좋지 않은 일들..

1. 뭐..일단 다들 아시다시피 서울 교육감 선거 결과는 좋은 결과를 내진 못했습니다. 단순산술적으로 대한민국 인구 4분의 1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 선출에 투표율이 20%도 되지 않았다는 것과 불과 2만 2천표차로 당락이 결정났다는 것이 기분을 울적하게 만드는 군요. 촛불을 하면 뭐하나.. 에휴..

..촛불 대책위(요즘 뉴스를 안보고 살아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나 시위대는 특정후보 지지보다 교육감 선거 홍보를 했으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사교육 열풍은 갈수록 가속화되는 걸 막기 어려울텐데 과연 제가 교사 임용에 계속 뜻을 두어야 하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전 교사가 되고 싶지 공무원이 되고 싶진 않아요. 뭐.. 합격할 실력이 우선 갖춰져야 저런 말도 할 수 있는 거겠지만요.

암튼 어제처럼 서울시민이 아니었다는게 아쉬운 적이 없는 거 같군요.


2. 음..그리고 어제 임용고시 1차 시험일 날짜가 고지되었습니다. 11월 9일이라더군요. 작년보다 거의 한달 앞당겨졌습니다.




......



뭐 예상못하던 건 아니지만 막상 저렇게 확정이 되고보니 나름 충격이더군요. 시험이 2차에서 3차로 늘어나면서 행정상의 편의 문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던데..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1차 시험이 주관식에서 객관식으로 바뀐지라 다 전산처리가 될텐데 행정상의 편의는 무슨 개뿔인가 싶습니다.

암튼 그간 헛짓거리에 삼천포로 자주 빠진 저나 사범대 재학생들은 거의 날벼락 맞은 기분일 듯 싶습니다. 4학년 2학기 수업은 거의 파행이 될 건 뻔할 뻔짜고.. 생각 같아서는 행정소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3. ...그런 상황임에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나 봅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와중에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책상에 엎드린 자세도 아니고....




앉은 자세 그대로.....3시간을 내리 졸아버리지 뭡니까?








깨어나니 목이 끊어질 듯 아프더군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듯..






OTL

by 한단인 | 2008/07/31 10:00 | 트랙백 | 덧글(5)

아.. 살거 같다.

요 근래 땡볕만 계속되고 있었는데 새벽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네요.

서울 경기 부근만 비가 온다고 해서 그 비들 다 대구 경북에 내려라 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비가 내리고 보니 살거 같다능.. 덕분에 시원해서 모처럼 학교로 향하지 않고 집에서 신선놀음 하고 있는 중..

뭐..신선놀임이라고 해봐야 시원한 물을 끼고 선풍기 바람 쐐면서 엎드려 책 읽는 거지만

by 한단인 | 2008/07/25 15:22 | 일상 | 트랙백 | 덧글(5)

고구려 생활사 8회 강의 후기 - 한국 고대 종교와 생활

7회 강의 전쟁사 부분에 대한 후기 포스팅을 날리지 않고 바로 8회로 넘어가버렸군요. 이게 다 엉덩이가 무거운 탓.. 어쨌거나

생활사 강의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강의도 역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주제가 인간의식과 관련된 것인만큼 상징, 사고체계와 연관있는 다른 주제들과도 연계될 수 있는 주제라서 그 이전 주제들에 대한 심화된 사고나 보충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예를 들자면 士의 등장과 문자, 의식주 문제, 전쟁 등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강의 내용의 큰 흐름은 '고대도시'를 쓴 쿨랑주의 견해를 상당부분 차용하였는데 이 책은 학부 때 서양 고대사 수업 때 접했던 것(무려 100년전에 쓴 책임에도 아직도 강의나 연구에 활용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까지 크게 충격을 받진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얘기들이니까요. 하지만 쿨랑주의 견해를 접하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리라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역사 인식에서는 사적 유물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그 원인으로는 일제 시대에 한국 사회경제사를 집필한 백남운 때부터의 영향이 현대 연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라 생각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사회, 정치를 재단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얻은게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학부 시절에 무심히 듣고 생각하던 개념들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미진했던 부분과 잘못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생겼기 때문입니다.(뭐..매번 강의가 항상 그랬었지만 말입니다.) 

일단 재확인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이고 종교는 이 의식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인간에게 그 어떠한 정보나 지식도 허락되지 않은 '고대' 아니 선사 시대에는 모든 것을 종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라면 주변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자잘한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수 없었던 그들은 그에 대한 대처방식을 구하는데 '신'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신의 숨결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신의 의지'로 돌렸을 것입니다.(이 관점이 생활사 연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출발점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것은 별거 아닌거 같아도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과 '종교'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대와 선사에 대한 인식에서 '사적 유물론'적인 인식이 실제와 다를 가능성을 내비칩니다. 적어도 이때는 물질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물질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물론 완전히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중과 직접적인 영향력을 따진다면 후자가 더 크다고 하겠죠.)

따라서 선사와 고대를 논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은 적어도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 중에서는 사적 유물론에서 출발한 사회경제적 분석이 있었지만 의식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은 지극히 미약했다는 점입니다. 최근에서야 박대재 교수가 고조선사 연구에서 융사공동체라는 관념을 설명하면서 의식과 관념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실은 대단히 늦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서양고대사에서는 100년전에 쿨랑주가 주목했던 것임에도 말이지요.


두번째로 재확인 한 것은 '철학은 종교의 연장선상에 있다' 란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강의 때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습니다만 '유교도 종교다' 란 설명과 '종교의 체계적 정리 과정' 부분을 설명하실 때 간접적으로 캐치했던 것입니다. 좀 생뚱맞은 얘기지만 우리가 흔히 '철학'의 영역으로 생각하던 노장 사상이나 공자, 맹자의 사상 따위의 말씀들은 '신의 의지', 혹은 전해져 오는 '말씀'들을 보다 체계적,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하기 위한 종교의 일환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신'으로 표시되지 않고 '도'라는 형태로 전래되긴 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그것은 증명되지 않은 개인의 사고, 신념의 체계적 정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 영역이라고 생각하던 철학조차도 종교의 영역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본다면, '철학과 체계가 가미된 고등종교'와 '원시종교'라는 구분이 정치,사회,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차이가 난다라고 분석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발생할 것입니다.(물론 이 부분은 강의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고, 사유체계로서 철학은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란 것입니다. 즉, 도교와 도가가 다른 것 같아도..어찌보면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뿌리는 같으니까 말입니다. 단지 얼마나 더 사유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이 점은 2천년 전 처음 성립된 초기 기독교와 현재 기독교 (이것은 불교나 유교, 도교로도 치환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미신이라고 믿어지는 우리네 무당들이 얼마나 차이를 가지느냐란 의문과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도 할 것입니다.(물론 현재 우리나라 무당은 세번째 재확인한 것과 연계해서 아주 자잘한 찌꺼기만 남아있는 것이라 단순 비교하긴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세번째로 재확인한 것은 '사제왕'이란 개념입니다. 이 말은 제정분리가 전제되지 않은 왕을 의미합니다. 종교의 집전을 왕이 한다는 것에서 엄밀한 의미로 제정분리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봉선제사를 지내는 중국의 천자나, 구한 말에 원구단을 복원하고 제천한 고종황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게 따진다면 전문적 '巫'(제정 분리된 무당)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는가 란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말씀'에 독점적 권력을 가진 巫들의 권한이 커지고 발달하면서 사회적 분화역할분담으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을 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제왕인 '은왕'과 그 주변에 점복을 맡은 '정인'이 될 것 입니다. 사실 어렴풋이 인지만 할 뿐 명확한 개념적 구분을 하지 못했는데 그날 확실히 정리가 되었습니다.) 농경인의 사회적 분화란 개념은 익숙한데 '巫'의 사회적 분화라.. 그렇다면 존귀한 '巫'도 존재할 것이고 천한 '巫'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권력 관계와 사회적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이고 어떤 의미를 내려야 할까란 고민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의 재확인한 것과 연계한다면, 종교국가로서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 특히 한국사의 각 왕조들은 불교와 유교 도입 이전의 원시종교라고 지칭된 그것이 정말로 하등하고 원시적이며 비체계적인가 란 의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과연, 과학이 도입되지 않은 전근대 시대 통틀어서 '사제왕'이란 개념이 적어도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은 적이 있었나 란 의문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제정분리' 란 관점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된다면 아직도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부분에서 종교의 영역을 분리시켜 따져볼 수 없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뭐..그게 상호영향을 미치는 것이 당연하니 뭐 그리 대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근대 시대까지 종교가 이들 영역의 상위에 위치한다면 단순한 상호 영향을 미친다라고 하긴 어려울테죠. 적어도 현재까지의 연구 경향은 정치, 사회적 변화에 더 주목하고 종교는 찬밥신세입니다.(아직까지도 양천의 신분구조에 대해서 사회, 경제적 관점으로만 해석을 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날 강의에서 종교적 원인이 실질적인 원인이란 말을 듣고 '아..정말 난 바보였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학부 때 서양고대사 수업에서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한국사에서 똑같이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참고로 양천 신분구조에 대해 종교적인 원인을 따진다면 이것이 힌트가 될 것입니다. 현상에 대한 모든 이해를 '신의 의지'로 돌렸다는 것과 이교도란 관점 2개를 복합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전쟁포로란 형태로 노예가 된 사람의 신이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은 승자의 신이 더 강하여 패자의 신을 굴복시킨 것으로 이해하거든요.)

실은 아직도 근대인의 사고관념을 전근대 사람들의 사고관념과 같은 것이란 무의식에서 연구를 진행하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그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조공책봉'에 대해서 근대적 정치외교적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하려는 사람은 조공책봉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천명(天命)이란 종교적 관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쓰다보니 강의 내용을 상당부분 스포일러 하고 말았네요. 물론 스포일러 한 부분은 대체로 쿨랑주가 '고대도시'에서 언급한 것에 선생님이 살을 더한 것이고 선생님이 새롭게 언급한 부분은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내년에 책이 나오면 참조하시는게..(도주중)

by 한단인 | 2008/07/24 12:25 | 각종 강의 후기 | 트랙백 | 덧글(2)

허헛..2만 힛을 놓쳤구나..

 
 오늘 방문자 수20
 어제 방문자 수264
 금주 방문자 수449
 전체 방문자 수20,004
  주별 방문자 수
이번 주40656026420--
지난 주44684958415632


2만 샷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잠이 들어 깨보니.. 4명을 지나쳐 있었다능..

..쳇

그래도 1년 안되서 2만 힛이라니 나쁘진 않은 듯..

낚시 떡밥을 더욱 더 양산해야..(도주중)

by 한단인 | 2008/07/24 06:50 | 일상 | 트랙백 | 덧글(6)

이승기가 부릅니다 - 그래서 어쩌라고 - '미국 애널서킹'

美 박사학위 배출 中에 역전… 서울대,글로벌 인재 ‘빨간불’

기사를 보다가 참 어이가 없었다. 왜..미국 박사학위 배출 역전된 게 '글로벌' 인재에 빨간불이 되나?

미국=글로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대학이 미국에만 있나? 유럽 대학은 대학도 아닌가 보군..

장비에 있어서는 뭐.. 돈으로 쳐바른 미국 대학이 좀 나을 순 있겠지.. 그런데 과연 학문적 지성에 있어서도 미국이 우위에 서있나? 돈으로 쳐바른 것으로 치면 경제대국 일본도 있겠네...

..아니 것보다.. 왜 서울대 출신 '박사'들이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 받고 미국에서 활동하게 두는게 '자랑스러운' 거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그네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이휘소 캐릭터도 아닌데 말야..

대한민국 대학에서 열공해서 글로벌 인재 되면 안되는 건가?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하는게 글로벌 성의 지표지수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 인간들의 사고구조가 참..

적어도 유럽에도 미국보다 잘나가는 대학들 수두룩하게 많고, 미국 대학보다 돈많은 대학들도 적진 않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미국에만 매달려야하는 거냐? 정말 정치 경제적 식민지도 모자라서 '학문적' 식민지로 자리매김하고 싶은거냐? 그런거야?

ps. 아.. 하긴 외국 대학은 미국 대학이 전부인 줄 알고 거기로만 유학을 가는 게 다행인 줄 아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라 미쿡대학 '진학율'이 떨어지니 저런 호들갑 떠는게 그 인간들 머리속에서는 당연한 얘기겠군.

..그냥 하와이로 이민이나 가지 그래들?


추가글 : 이 포스팅의 유사 검색에서 '누리' 님이 쓰신 포스팅을 보다가 더 화가 났다. 누리님이 요약하신 사이언스 지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기사에서 중국의 관계자는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아도 충분하도록 중국의 고등교육제도를 개선하려고 노력 중이다라고 밝혔다는데요. 사실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되지 않는한 중국에서도 외국 박사학위를 따려는 시도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대체 뭐냐.. 에이 썅..

by 한단인 | 2008/07/23 00:30 | 트랙백 | 덧글(15)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